여행을 주제로 한 작업(영화, 책, 그림 등 장르 불문) 중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 추천해주세요.
송 <포토그래픽 메모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좋아해서 여러 번 봤어요. 다큐멘터리 감독 로스 맥켈위(Ross McElwee)의 작품으로, 촬영부터 출연, 내레이션까지 직접 맡아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영화에서 그는 인터넷과 전자기기에 빠져 있는 부루퉁한 십대 후반의 아들과 자꾸 부딪힙니다. 마냥 사랑스럽던 어린 시절과는 달라진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아들 나이에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게 돼요. 그리고 그 시절의 그가 사진가의 조수로 일하며 잠깐 머물렀던 프랑스의 해변 마을, 생캐 포트리외(Saint-Quay-Portrieux)로 향합니다. 한때 익숙했던 장소의 변해버린 모습을 마주하고, 그 동안 당시의 일을 실제와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들과의 관계도 돌아봅니다. 잔잔하지만 과거와 현재, 기억과 진실,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영화예요.
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저에게 더 이상 예전만큼의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그가 힘을 빼고 쓴 여행 에세이는 여전히 술술 읽히고 재미있어요. 그중 한 권을 고르자면 <먼 북소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루키가 유럽에 머물며 <상실의 시대>와 <댄스댄스댄스>를 집필하던 시절에 쓴 여행 에세이를 모은 책이에요. 폭풍이 불어닥친 비수기의 그리스 섬에서, 도둑들이 호시탐탐 가방을 노리고 우편은 보내는 족족 사라져 버리는 로마에서, 하루키는 아내와 음식을 해 먹고 조깅을 하고 글을 씁니다. 표지에 적힌 ‘낭만과 감성의 유럽 여행 에세이’라는 수식어와 달리 꽤 드라이하고 시니컬한 태도가 느껴지는 글인데, 곳곳에 숨어있는 이상한 웃음 포인트들이 좋습니다.
코로나가 끝난다면 가장 떠나고 싶은 여행지와 그 이유는요?
요즘은 새로운 곳보다 한 번 다녀왔던 곳에 다시 가고 싶어요. 2017년 유럽으로 오면서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를 여행했는데, 그중 1산레모(San Remo)가 기억에 남아요. 송이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를 좋아해요. 산레모가 그의 고향이라고 해서 이탈리아 여행 일정에 넣었거든요. 정작 가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칼비노 관련 워킹 투어는 날짜가 안 맞고, 칼비노 박물관이나 기념관 같은 것도 없고. 그래서 칼비노와는 관련이 하나도 없는 여행을 했죠. 산레모에는 뒷동산 같은 높은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이탈리아 특유의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이 보여요. 칼비노의 소설에 등장하는 끝없이 펼쳐진 2옴브로사(Ombrosa)의 숲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예상과는 달랐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좋은 도시였어요.
스웨덴 북쪽 끝의 트레킹 코스인 쿵스레덴 (Kungsleden)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역시 한 번 다녀왔던 곳인데, 북극권에 위치해 높은 나무가 없고 이끼와 관목만 자라는 구릉지대예요. 풍광이 정말 아름답고 시야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 곳이에요. 하루에 사람을 한두 명 마주칠까 말까 한 길을 15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종일 걸었는데, 정말 생경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트레킹 중간에 최의 무릎에 통증이 생기는 바람에 처음 계획한 코스를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에 끝내야 했죠. 기회가 된다면 하체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 때 계획한 코스 그대로 걸어보고 싶습니다.
1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Liguria)주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
2 칼비노의 소설 <나무 위의 남작(Il Barone Rampante)>에서 이탈리아 리비에라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되는 가상의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