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실험실 보연정의 내부 모습

 

ⓒ 피치 바이 매거진

Toast to my own whiskey
나만의 위스키를 찾아가는 여행

BTS가 즐겨서, 영화 <헤어질 결심>에 등장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좋아하는 위스키 맛을 찾아 떠나는 위스키 실험실 ‘보연정’의 여정.

인터뷰어 박진명
인터뷰이 정보연(정보연 컴퍼니 대표)

위스키 실험실 보연정은 공업사 사이에 자리해 있다. 보연정의 정보연 대표는 보연정의 자리를 정하기 전, 공업사가 모여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 다녔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담배를 입에 물고 작업에 몰두하는 공업사 사장님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1층과 다락방으로 나뉜 공간 구조에 마음이 동해 청파동 지금의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1층은 2070년의 런던, 다락방은 2070년의 도쿄를 상상하며 공간을 꾸몄어요.” 본인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지니고 싶은 기물과 가구로 보연정을 채웠다. 냉장고와 싱크대를 제외한 모든 물건은 세컨드핸드 제품. 다락방에 있는 전축과 스피커는 정보연 대표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보연정에서 만난 정보연 대표가 아버지의 젊은 날이 녹아 있는 전축과 스피커로 노래를 틀었다. 다다미를 깔아놓은 다락방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대라고 일러줬다. 오래 숙성한 위스키처럼 진하게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과 건물 바로 뒤로 지나가는 지하철의 진동이 몸에 닿았다. 알싸한 위스키 한 잔이 절실해지는 애주가의 밀실에서 정보연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소개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보연정 자체 프로그램 외에도 외부에서 제안받는 브랜드나 프로그램 기획, 마케팅 일을 하고 있어요. 가장 최근에는 서울 연남동에서 열리는 이지은 작가의 1 <장인의 아틀리에> 출판 기념 사진전과 북토크를 준비하고 있어요.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한 회를 추가 오픈했는데, 또 금세 매진돼 기분이 좋습니다. 작가님의 팬들 덕분이죠.

2007년 출판된 이지은 작가의 <유럽장인들의 아틀리에>를 다시 출간했다고요.
맞아요. <유럽장인들의 아틀리에>가 절판되고 중고서점에서는 고가에 판매되곤 했어요. 이번엔 모요사 출판사를 통해 다시 출판하게 되었고, 편집장님과 작가님 말로는 거의 다시 썼다고 하더라고요. 한 번 절판된 책은 다시 살아나기 어려운데, 역시 좋은 콘텐츠는 시대가 변해도 회자되는 법인가 봐요.

보연정에서 다루고 있는 위스키나 빈티지도 오래된 가치 중 하나죠. 어떻게 이 분야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원래 이커머스 플랫폼의 마케터였어요. 주로 패션과 뷰티 상품을 다뤘죠. 패션은 유행이 빠른 산업 중 하나잖아요. 소비자의 구매를 유도하는 게 마케터의 역할이다 보니 ‘이게 유행이니까 사야 돼요’ ‘이런 점이 좋으니까 사야 돼요’ 이런 이야기를 전하면서 내면의 갈등이 있었어요. 각자 가치에 따라 소비를 하면서 취향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오랫동안 지니고 있을 만한 제품, 다시 꺼내 볼수록 좋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트렌드를 읽으면서도 그 안에서 소장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선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데 집중했어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가치를 콘텐츠로 연결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1 프랑스에서 18세기 미술사를 공부한 이지은 작가의 저서로, 하프시코드부터 시계 무브먼트까지 프랑스 출신 장인 12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연정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나요?
주로 위스키를 주제로 클래스와 전시를 열어요. 사진, 그림, 음악 등 위스키를 마시며 함께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아우르죠. 보연정은 최대 8명밖에 수용할 수 없어서 반응이 유독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규모가 더 큰 외부 공간에서 행사를 확장해 진행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지난여름에 기획한 ‘향기를 듣다’는 재즈를 들으며 주제에 어울리는 위스키를 테이스팅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보연정에서만 즐기기엔 아쉬워 음향 스테레오가 잘 갖춰져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더 많은 분을 모시고 진행했죠.

개인적으로 ‘버번과 모자 : 미국 로드트립 이야기’가 인상깊었어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가 예전에 자주 다니던 신촌의 바 사장님이에요. 위스키 입문자에게 착한 가격으로 술을 제공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젊은 청년인데요. 가게를 정리한 후, 53일 동안 미국 횡단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 이야기를 곁들인 위스키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끝내기엔 너무 아까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전시와 클래스를 제안했어요. 이 친구가 경험했던 순간을 좀 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360카메라로 찍은 영상과 사진, 미국 횡단 여행 중 구매한 모자들을 전시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가 다녀온 4곳의 증류소를 소개하고 각 위스키를 마시는 클래스를 마련했죠.
5월쯤 또 다른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일본 도쿄 거리에서 스냅 사진을 찍던 한국인 디자이너가 있어요. 귀국한 뒤로 카메라에 흥미를 잃었다고 하길래 함께 전시를 해보기로 했어요. 저는 이 친구의 사진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자연스러운 데다 어디서 본 적 없는 톤이랄까.

가장 기억에 남는 기획은 무엇인가요?
지난해 11월, 도자기를 빚으며 드로잉을 하는 한차연 작가와 ‘짠’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했어요. 한차연 작가가 빚은 술잔과 드로잉 작품을 큐레이팅해 전시했죠. 한차연 작가도 워낙 팬덤이 견고하다 보니 반응이 뜨거웠고요. 그림에서 느껴지는 스모키한 느낌이 위스키와 참 잘 어울려요. 저도 전시에 소개된 그림 중 한 점을 구매했어요.
보연정은 간판도 없고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하긴 힘든 위치예요. 의도한 건지 궁금합니다.
정말 전시나 클래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보연정 프로그램의 예약도 1인 1석으로 제한하고 있어요. 본인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되도록 스스로 결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공간 이름은 ‘보연정’, 회사명은 ‘정보연 컴퍼니’로, 본인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어요. 자신감이 느껴지는데요.
물론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웃음).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하다 보니 대중은 저라는 사람을 모른다는 점이에요. 독립하면서 저라는 개인과 제가 하는 일을 동시에 마케팅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어요. 소규모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마케팅 예산이 넉넉지 않잖아요. 공간과 회사 이름에 제 본명을 활용하면서 한꺼번에 해결하기로 결심했죠.
사실 보연정에서 ‘정(亭)’은 제 성(丁)과는 달라요. 정자 정(亭)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가장 작은 집의 단위를 뜻할 때는 집 안의 일상이 가진 힘을 다뤄보자는 생각이었어요. 물가 옆에서 쉬는 공간을 의미할 때는 위스키나 와인, 차 등의 음료를 소개한다는 뜻과 (위스키에) 취한다, 흘러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저와 이 공간의 의미를 함께 녹일 수 있도록 브랜딩한거죠.

위스키를 처음 접한 순간을 표현한다면.
기본적으로 향과 술을 좋아했어요. 야근 후 가끔 바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곤 했는데, 어느 날은 바텐더가 위스키를 소개해주더라고요. 제게 위스키를 건네며 어떤 작가가 이 술을 좋아했고 어떻게 이런 향이 나는지, 또 어느 책에 등장했는지 그 위스키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그날 밤 바 안 공기가 살짝 차가웠는데, 위스키가 몸과 공간에 퍼지자 모든 감각이 열리는 것 같았죠.
이후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위스키 공부를 시작했어요. 당시 한국에는 위스키 관련 책이 딱 한 권(<위스키 수첩>, 성중용 지음)뿐이라 아마존에서 원서를 주문해 읽을 정도로 열정적이었죠. 2019년, 지식과 경험이 쌓여 <하루의 끝, 위스키>라는 책을 내게 되었고, 올해 6월에는 두 번째 책인 <여행의 끝, 위스키>가 출간될 예정이에요. 원고 마무리 중인데 생각만큼 진도가 더뎌 매우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웃음).
최근 호주로 위스키 증류소 투어를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사실 와인이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매커니즘이나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좀 더 공부하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어요. 저는 아무래도 위스키를 많이 접하다 보니 오크 터치가 강한 술에 익숙한 편이에요. 종종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 맛있다고 생각하는 술이 대부분 호주나 뉴질랜드, 미국과 같은 신대륙에서 생산한 와인이더라고요. 와인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호주 남부 와이너리 투어를 했죠. 귀국을 하루 앞두고 멜버른으로 다시 돌아온 날, 욕심을 내 요즘 핫한 스타워드(Starward) 증류소까지 둘러보고 왔어요.

호주 위스키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보통 위스키를 처음 만드는 나라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방식을 따라하게 마련이거든요. 호주는 워낙 식음료가 발달한 나라다 보니, 맥주, 와인, 커피 등 각기 다른 음료 전문가와 협업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 덕분에 호주산 위스키는 새로운 맛과 풍미가 느껴지고 개성 강한 것 같아요. 게다가 호주는 위스키 양조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현지에서 하루 안에 구할 수 있는 유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요. 사실 스코틀랜드 위스키도 전부 현지에서 재배한 보리로 만들지는 않거든요.
또 요즘 와인 캐스크에서 숙성하는 위스키가 인기가 많잖아요. 호주 지천에 널린 게 와인 오크통이다 보니 좋은 품질의 오크통을 쉽게 활용한다는 것도 장점이죠. 아직 더 발전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본인들의 장기를 살려 위스키 시장을 이끌고 있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똑똑한 스타트업같은 느낌이랄까.
술이 발효되면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잖아요. 요즘 탄소 배출이 이슈인데, 직접 방문한 양조장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미국을 제외한 위스키를 양조하는 나라들은 와인 또는 위스키 숙성에 사용한 오크통을 재활용하고 있어요. 미국은 버번이나 위스키를 만들 때 무조건 새 오크통을 사용해야 한다는 법이 있거든요. 스코틀랜드나 호주 등에는 그런 법이 없으니 미국에서 사용한 오크통을 재활용해요. 보통 최대 4번까지  재활용하는데, 회차에 따라 위스키 맛이 달라져요. 위스키 라벨에도 사용 회차를 표기하고요. 4회를 다 채운 오크통은 폐기하거나 가구 회사로 보내 또 재활용하기도 해요. 재미있는 건  스코틀랜드에서 매년 10월 열리는 달리기 대회 ‘드래마톤(The Dramathon)’에 참가하면 오크통으로 만든 메달을 줘요. 드래마톤은 글렌퍼클래스(Glenfarclas) 양조장에서 시작해 주요 증류소를 거쳐 글렌피딕(Glenfiddich) 양조장까지 2 각 레이스를 완주하는 마라톤 경기예요. 작년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이미 매진되어 현장 취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올해도 다시 도전할 거예요(웃음).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 술이나 담배를 판매하는 회사들이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되곤 해요. 아무래도 사람 몸에 해로운 비즈니스니까요. 그래서 이들은 일찍부터 환경적인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왔어요. 야생 늪지대에 자리해 있는 글랜고인(Glengoyne)의 증류소는 액체 폐기물을 정화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늪지대에 있는 12개의 웅덩이와 갈대밭을 통과하면서 정화된 물이 다시 안전하게 강물과 만나게 되죠. 또, 100퍼센트 풍력과 태양열 에너지 사용하는 등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글렌피딕은 증류 폐기물로 바이오 에탄올을 만들어 스코틀랜드 내 운송 트럭의 연료로 사용하고 있고요.
이외에도 화려한 소재와 디자인을 강조하던 위스키 패키지도 옛말이에요. 우리가 만나는 위스키 패키지는 대부분 재활용이 가능한 종이로 제작되고 있어요. 

입문자도 어렵지 않게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많은 사람이 도수가 높으니까 어려운 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위스키는 향기를 즐기는 술이라 도수가 그대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제조 회사나 양조장, 연도에 따라 다양한 향을 즐길 수 있어서 정말 매력적인 술이죠. 위스키의 향기만 즐기고 싶을 때는 위스키를 술잔에 담아 스탠드 아래에 놓고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기도 해요. 마음에 안정을 주는 디퓨저처럼 공간에 서서히 퍼지는 향을 맡는 일이 즐거워요. 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향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위스키의 매력에 금세 빠지게 될 걸요.

2 풀 드램(약 42킬로미터), 하프 드램(약 21킬로미터), 위 드램(약 10킬로미터), 릴레이(4인 1조로 약 10킬로미터) 총 4가지 레이스가 있다. 여기서 드램은 위스키 한 잔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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