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넛츠의 매장 외부 전경

 

ⓒ 페이퍼넛츠

Happy Nuts’ Store
행복한 견과 상점

무포장 견과 상점 ‘페이퍼넛츠’의 김혜정 대표가 기후 우울증에 지친 이들을 위해 부르는 힘찬 응원가.

인터뷰어 박진명
인터뷰이 김혜정(페이퍼넛츠 대표)

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온다는 처서가 지났다. 폭염과 폭우, 화재로 인해 유독 기나긴 여름을 보낸 기분이다. 이 모든 현상의 주요 원인이 기후 위기 때문이라니, 무력감과 상실감이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을 테다. 기후 우울증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기후 우울증 혹은 기후 불안증은 스스로를 인류의 마지막 세대라 여기는 10~30대 젊은 청년이 겪은 우울장애 현상을 일컫는다. ‘텀블러를 사용하고 분리배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땐 자신만의 환경 철학을 고수하는 공간을 방문해보는 건 어떨까.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무포장 견과 상점 ‘페이퍼넛츠’는 추천할 만한 공간이다. 견과를 플라스틱∙비닐 용기 대신 유리병이나 재생지에 담아 판매하고, 물티슈 대신 물에 적신 손수건을 건네며, 다 쓴 우유팩으로 휴지를 만드는 ‘우유갑되살림(한살림에서 주도하는 캠페인)’에 참여한다. 운영자의 환경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사소한 움직임으로도 변화가 생기겠구나’란 확신을 얻게 될 것. 게다가 견과류를 먹으면 행복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 분비가 늘어나 우울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 
페이퍼넛츠의 견과가 특별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매일 아침 흐르는 물로 견과를 세척한 후 오븐으로 구워낸다. 강한 바람으로 빠르게 견과를 식혀 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얼그레이 찻잎으로 은은한 향을 더한 호두, 고운 코코넛 슈레디드를 고루 묻힌 헤이즐넛 아몬드, 시나몬 가루를 뿌린 피칸 등 100퍼센트 식물성 재료로 만든 다양한 견과류 세상이 펼쳐진다. 견과에 곁들이는 공정무역 원두로 내린 드립 커피와 그래놀라, 제철 과일 등을 얹은 두유 요거트볼 등 역시 페이퍼넛츠의 자랑이다.

 
제로 웨이스트 견과 상점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사실 페이퍼넛츠는 친언니의 주도로 탄생한 공간이에요. 언니가 어렸을 때부터 군것질을 좋아했는데, 알레르기 때문에 대체할 수 있는 간식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견과류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는데, 좋은 견과를 맛있고 건강하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견과 상점까지 구상하게 된 거죠.  저는 운영과 포장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방법들을 함께 고민하면서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었어요. 제로웨이스트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더라고요. 2019년 말 오픈했고, 현재 언니는 육아휴직 중이라 저 혼자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페이퍼넛츠의 견과만의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시중에 판매하는 견과를 접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을 보완하려고 했어요. 견과류가 건강한 식자재로 알려져 있지만, 시중에 유통되는 견과류에는 생각보다 많은 불순물과 방부제가 묻어 있거든요. 저희는 매일 아침 생견과를 깨끗하게 세척해 오븐에 구워 그날 그날 소비하고 있어요. 온라인으로 판매할 때는 재활용이 쉬운 무코팅∙무염료 재생지에 담아 발송하고요.

제철 과일과 두유 그릭 요거트에 견과를 넣은 요거트볼도 제공하고 있어요.
제가 제철 식자재에 진심이거든요(웃음). 제철 음식을 즐기는 게 나를 보듬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제철 식자재를 생산하는 유기농가를 하나둘 찾다 보니, 요거트볼까지 만들게 됐어요. 제주의 금귤, 경북 영천의 살구, 전남 해남의 무화과 등으로 메뉴를 만들죠. 두유 그릭요거트를 준비할 때만 해도 국내에 식물성 요거트를 판매하는 곳이 거의 없었죠. 그러고 보면 매장을 운영한 시간만큼 세상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제로 웨이스트와 비건을 지향하는 공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죠.
업계의 콘텐츠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작년부터는 지원 사업이나 예산 규모도 줄어들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기획했던 일이 중단되는 경우도 생기고요.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기준점을 찾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쓰레기가 덜 발생하는 매장을 운영하기 위해선 기존에 없던 방식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제로 웨이스트나 비건을 공부하다 보면 내가 부족한 부분이 끊임없이 보이거든요. 돈을 벌려면 어쩔 수 없이 쓰레기가 생기니까 현실과 이상의 괴리 때문에 무척 방황했죠. 고객에게 효과적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제가 편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에요.

그럴 땐 타협하는 편인가요?
합의점을 찾는 편이에요(웃음). 예를 들어, 오픈 초기에 냅킨 대신 손수건을 제공했거든요. 그런데 손수건에 익숙하지 않는 손님들은 손수건을 이용하지 않고 화장실 휴지를 사용하더라고요. 그래서 대나무 냅킨 정도로 합의를 봤죠. 물티슈는 용납이 안되더라고요(웃음). 대신 손수건에 물을 묻혀 제공하고 있어요.
플라스틱 용기 대신 유리병을 대여해주는 서비스도 만들었는데요. 유리병 역시도 새 것을 끊임없이 사용하는게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소주나 맥주병을 제외하면 재활용률이 극도로 낮고 탄소배출량도 많은 편이니까요. 그래도 자원 순환이 가능하고 플라스틱보다는 낫다 보니, 테이크아웃 손님을 위해선 유리병이 최선이었죠. 저희 서비스 중에서 비교적 자리를 잘 잡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페이퍼넛츠의 철학을 고집하기 위해선 계속해서 저희만의 방식을 만들어가야 하겠죠.

 
재사용에 거부감을 느끼는 손님은 없었나요?
아예 없진 않지만, 저희 매장을 이용하는 손님 대부분은 재사용을 당연하게 여기죠. 저희만의 철학과 취지를 좋아해 단골이 된 사람들도 있고요.

그럴 때 뿌듯할 것 같아요.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저희 매장에서 재활용 용기로 포장하는 경험한 분이 다른 곳에서도 이를 실천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예요. 또 오픈 1년차까지는 메뉴에 비건 옵션을 제공하는 정도였는데, 2년차부터 모든 메뉴를 완전 비건으로 바꿨거든요. 저희와 함께 비건을 지향하는 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도 뿌듯하죠. 누군가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보다 최고의 칭찬은 없는 것 같아요.

 
이 공간을 운영하면서 영감을 받았거나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있나요?
매장을 오픈하기 전에 언니와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특히 저희처럼 동네 골목에 있는 소규모 공간을 둘러보며 포스터나 소품 등을 모으고 가구나 공간 배치 등을 관찰했어요. 제로 웨이스트 여행도 여러 번 시도해봤거든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고요.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기 쉬운 여행지를 추천한다면?
바로 생각나는 건 싱가포르와 제주. 싱가포르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보니 식물성 음료부터 채식까지 비건을 위한 카페나 식당이 많더라고요. 물티슈를 무료로 제공하지 않고 판매하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사소한 규제 덕분에 싱가포르를 여행하는 동안 불필요한 쓰레기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어요.
제주는 워낙 오래 전부터 다회용기에 포장해주는 문화가 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제로 웨이스트 여행이 그리 어렵지 않아요. 텀블러를 헹군 다음 음료를 넣어 달라고 부탁할 때도 크게 눈치 보이지 않고요. 제가 제주 동쪽에 있는 구좌를 좋아하는데, 그곳에서 머물렀던 숙소들은 모두 정수기를 비치해 놓았더라고요.
 
페이퍼넛츠로 전달하고 싶은 궁극적인 이야기가 있다면?
지금까지 쓰레기 문제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웃음) 사실 가장 알리고 싶은 건, 견과의 깨끗하고 깔끔한 맛이에요. 오래돼 기름에 찌든 견과 말고, 갓 구운 견과의 신선한 맛을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어요. 플라스틱∙비닐로 포장된 제품이 무조건 깨끗하고 완벽하다는 편견도 깨고 싶어요. 마지막으로는 제철 과일의 맛을 알리고 싶어요. 그 맛을 아는 건 엄청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바쁜 일상에서 나 자신을 보살피는 힘을 만들 수 있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페이퍼넛츠는 어떤 미래를 꿈꾸나요?
사실 지금 저희가 매장에서 취급하는 견과는 모두 수입산이에요(백화점에 납품되는 질 좋은 견과를 사용하고 있어요). 국내에는 높은 산이 많아 견과 재배가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저희처럼 작은 매장에서 판매하기엔 너무 비싸거든요. 하루빨리 국내산 햇견과를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공간의 운영자로서, 확장을 추구하기보단 깊이를 더해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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