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커하우스 보보

The Essence of Ultra Light Hiking
자연에서는 모든 짐을 내려놓으세요.

산으로, 숲으로 향하는 짐의 무게는 어느 정도여야 적당할까. 비행기를 타기 위해 수하물의 무게를 재며 생각했다. 저울의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맥박수가 빨라지는 걸 보니 많이 가졌다고 마냥 행복한 건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무게는? 생각이 여기까지 닿다 보니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을 지향하는 카페, ‘하이커하우스 보보(步步)’에 이르렀다.

박진명
인터뷰이 조현수 대표(하이커하우스 보보)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Ultra Light Hiking)은 199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다. 말 그대로 ‘아주 가벼운 하이킹’으로, 40~50리터 용량의 배낭에 최소한의 짐을 챙겨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정도의 비와 햇빛만 가려주는 얇은 타프 아래에서 밤을 보내고, 조리하는 데 연료 소비가 적은 식량으로 끼니를 때운다. 어깨에 진 무게를 덜어낸 만큼 힘을 들이지 않고 더 먼 거리를 여행하고 편안한 상태로 자연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이 던지는 화두다.

‘하이커하우스 보보(步步, 이하 보보)’는 제주를 여행하는 하이커를 위한 카페다. 10평 남짓한 공간에선 커피를 마시거나 스콘이나 그래놀라 등 직접 만든 디저트를 맛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 푸드라고 불리는 '보보에너지큐브'가 있는데, 직접 내린 드립 커피를 젤리 형태로 만들었다. 하이킹에 필요한 제품과 장비도 구입할 수 있다. 보보의 조현수 대표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장비 활용 노하우는 덤이다(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의 핵심은 얼마나 지혜롭게 장비를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도시에서 빵을 굽던 조현수 대표가 제주로 흘러 들어와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을 소개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메모 1.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이란?

하이커하우스 보보를 소개해주세요.

하이커하우스 보보(步步)는 제주 서귀포시 위미리에 위치한 하이커를 위한 카페예요. 하이킹할 때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는 ‘울트라 라이트 푸드’를 직접 만들어 판매하고, 걸을 때 필요한 용품도 구입할 수 있는 곳이죠.

‘보보’는 무슨 뜻이에요?
보보(步步)는 ‘한걸음 한걸음’이라는 뜻의 한자어예요. 2017년부터 와이프가 운영하는 댄스 스튜디오 ‘탄츠하우스인제주’에서 아이폰으로 기록한 아이들과의 시간을 전시하고 사진집으로 발간한 적이 있는데, 그때 지은 책의 제목이에요. 걸음마를 배우듯 각자의 길 위에서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ULH)을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하이커하우스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했죠.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릴 적 등산용품점을 운영하신 부모님 덕분에 국내 아웃도어용품과 아웃도어 문화의 변천사를 자연스레 알게 되었죠.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 문화는 2016년 *베러위켄드(Better weekend)의 OTT(On The Trail)에 참여하면서 처음 접하게 됐어요.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이 가져온 삶의 변화가 있나요?
정말 많아요. 표면적으로는 평생직장으로 여기던 회사를 그만두고 보보를 시작하게 된 게 가장 큰 변화죠. 내적으로는 자연에서 나고 자라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우리의 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자연을 잠시 빌린 하루의 의미를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게 됐어요. 삶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살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와 좋고 바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힘도 생겼고요. 특히 집 주변의 숲을 자주 찾으면서 그곳에서 내면의 본질에 집중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저만의 걸음을 걷게 된 것도 하나의 변화인 것 같아요.

*베러위켄드(Better weekend)는 아웃도어 기어 전문 웹 매거진으로, OTT(On The Trail)은 이들이 주최하는 하이킹 이벤트다.

메모 2. 제주에서의 새로운 시작

제주로 이주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번아웃으로 힘들어하던 아내와 함께 몇 번 제주를 찾았어요. 그때마다 ‘언젠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평온함을 느꼈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 서귀포로 발령을 받았고 2016년 가을, 제주에 살게 되었어요.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해주세요.
위미리와 보보요(웃음). 저는 이 공간을 정말 좋아해요. 10평 남짓한 공간을 설계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가 가진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아냈기 때문일까요. 보보에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해요. 정성들여 메뉴를 준비하는 새벽부터 저만큼이나 보보가 가진 정체성과 문화를 좋아해주는 손님과 만나는 순간순간까지 모두요. 제 일은 약속 없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인데요. 제주의 하늘처럼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어 매일이 설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휴무일에는 가까운 숲과 근처의 바다에 가고요. 작년 겨울 캠페인성의 하이킹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한 스누피가든도 최근에 좋아하게 된 장소예요.

메모 3. 하이커의 여행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베를린과 교토. 교토에서는 베이킹 연수를 하고 일한 경험이 있어요.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가 되어 보니 교토라는 도시가 좋아진 것 같아요.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느꼈던 공기와 자신의 철학과 정성이 담긴 음식을 파는 골목의 작은 가게 등 그곳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늘 그리워요. 보보를 찾는 분들이 ‘이곳에 있으면, 교토의 어딘가에 와있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을 하러 떠나고 싶은 여행지는?
일본 남쪽의 작은 섬 야쿠시마는 어릴 적 즐겨 보았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 나오는 배경지예요. 제주와는 또 다른 자연과 수많은 트레킹 코스가 있다고 해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랜선으로 인연을 맺게 된 ‘이소우 커피(Issou Coffee)’라는 카페도 이 섬에 있는데요. 그곳에서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운영자와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고 싶어요.

지속 가능한 여행을 실천하는 여행자에게 추천하는 제주 여행, 혹은 울트라 라이트 하이킹 코스는 무엇인가요?
제주는 탐방로가 아주 잘 조성되어 있어요. 안전한 탐방로를 그날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걷는 건 어떨까요. 숲이 좋으면 숲길을, 바다가 좋으면 바닷길을, 동네를 둘러보고 싶다면 구불구불 마을 길도 좋겠네요. 누군가가 걸으면 그곳은 길이 되고 코스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비슷한 취향인 분에게는 한라산 둘레길 코스를 추천할게요. 코스별로 자세히 안내돼 있어 초보자도 쉽게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죠.

지속 가능한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여행의 의미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관점을 바꾸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웃도어 활동도 유행따라 번지곤하는데 남이 추구하는 것에 따라가지 않고, 인증하지 않고, 소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신경쓰기보다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무언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나의 길, 나의 걸음을 나만의 속도로 걸어보세요. 그런 의미에서 지속 가능한 여행이란 익숙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현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행이 아닐까요.

메모 4. 작지만 큰 카페, 하이커하우스 보보의 미래?

하이커하우스 보보를 지속 가능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매장에 오는 손님 중 장비 사용법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하이킹의 목적이나 계획에 따라 장비 다루는 방법을 상세히 안내해드리고 있어요. 요즘에는 바로 위층에 ‘콜라주플라츠(Collage platZ)’라는 문화예술공간을 준비하고 있어요. 다양한 모습과 생각의 조각이 모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곳입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듯 전시, 공연, 워크숍, 교육 프로그램 등 자연의 리듬에 맞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무언가를 지속하는 방법은 그냥 계속하던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여행자와 하이커에게 어떤 공간이 되고 싶나요?
추울 때는 몸을 녹일 수 있는, 더울 때는 땀을 식힐 수 있는, 배가 고플 때는 배를 채우고, 목이 마를 때는 목을 축일 수 있고 숨이 찰 때면 한숨 쉬어갈 수 있는 그런 곳. 오랜만에 만나도 바로 어제 만난 것 같은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 오듯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의 꿈과 계획을 알려주세요.
자연에서 모든 경계를 풀고 안전한 탐방로를 따라 편안하고 가볍게 걷는 하이킹 문화를 알리고 싶어요. 이 문화가 환경 감수성과 생태 감수성을 깨우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활동으로 확장되길 기대하고 있어요.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고 자연과 예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협력하고 연대하기를 소망합니다. 앞서 언급한 문화예술공간인 ‘콜라주플라츠’를 준비하며 오래 묵은 유휴공간을 겨우내 쓸고 닦고 칠을 했죠. 4월 말 아티스트의 무용극 공연을 시작으로, 5월에는 제주도민들의 필름 사진을 전시하는 행사를 계획 중이에요.

메모 5. 예전에 여행을 할 땐 내 키만한 배낭도 모자라 캐리어까지 가득 채우고 다니며 그 짐을 어떻게든 짊어지는 법을 익혔다. 여행이란 결국 자기 배낭의 무게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 꿋꿋하게 감당해낸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하지만 지금은 짐을 쌀 때마다 무엇을 덜어낼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동안 무겁게 이고 다닌 짐은 나를 단련시키는 수단이나 완벽한 준비성의 상징이 아니라 미처 내려놓지 못한 조바심이자 불안감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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