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ening to the sound of tea in Ganjin
차와 달과 노래가 있는 강진 차 여행

"강진으로 차 여행 갈래? 절친의 간명한 제안은 "강진에 놀러 갈래?"와는 다른 밀도로 다가왔다. 맛집, 카페, 펜션에 더해 산, 바다, 절로 이어지는 한 지역 돌아보기가 아닌, 콕 집어 차 여행이라니. 결코 우리의 방식이 아닌,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서정적인 느낌. 가을이 막 도착한 10월의 첫 날, '음악이 있는 강진 치유의 차 여행'에 동행했다.  

글과 사진 최현주

차와 풍류가 있는 정원

월출산 아래 녹차밭 걷기와 백운동원림 차 소풍, 차와 음악이 있는 야외 행사와 월정사지 야행 그리고 한옥에서의 하룻밤. 1박 2일 일정이 적힌 안내서를 보자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마도 우린 그곳에서 전에 없이 시적이고 맥락 있는 여행을 할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스스로 우아하다 느끼게 될지도. 
오만 가지 상상을 하며 도착한 강진. 처음으로 찾은 곳은 성전면 월남리의 강진다원(설록다원)이었다. 아모레퍼시픽에서 운영하는 무려 33만 제곱미터의 녹차밭. 월출산이 지붕처럼 받쳐줘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적당해 좋은 차를 얻을 수 있단다. 전망대에 서자 드넓은 녹차밭이 저 아래 소실점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다.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 차밭에 들어가 기념 촬영을 하고, 처음 보는 녹차 꽃(흰 꽃잎에 샛노란 수술이 달렸다)에 감탄도 하며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백운동원림에 닿았다. 
백운동원림은 담양 소쇄원, 보길도 세연정과 함께 호남 3대 별서정원 중 하나.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가 조영한 정원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그 아름다움에 반해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하늘을 가득 덮은 대숲을 지나 백운동 12경 중 하나인 정선대에 자리를 잡았다. 한숨을 돌렸으니 이젠 차 소풍을 즐길 차례. 차 바구니를 열어 작은 찻상을 펼친다. 유리 주전자에 동그란 떡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자 화르르 피어나는 찻잎의 열기. 소담한 잔에 따라 한 손으로 받쳐 드니 푸릇하고 구수한 향이 머리를 맑게 한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낮은 탄성. 다른 10여 명의 동행자도 나처럼 시큰한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차와 노래가 있는 저녁

차 소풍에 취해 오후 시간을 온전히 보낸 후 이한영문화원으로 향했다. 월남사지 건너편에 자리한 이한영문화원은 이현정 원장이 운영하는 차 문화원. 이한영은 다산 정약용의 제자 이시헌의 후손으로 이 원장의 고조 할아버지다. 일본인이 우리 땅에서 난 차를 저희 것인 양 팔던 일제강점기, 최초의 우리 차 브랜드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상표 등록까지 한 분이라고. 집안의 어른 이시헌은 1818년 다산 선생이 해배되어 강진을 떠난 후에도 해마다 강진의 차를 보내 다산과의 약속을 지켰단다. 
이한영문화원 안마당, 백운옥판차를 마시며 이현정 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200년 전 그 분들은 이 계절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전복과 묵은지, 호박전과 무화과가 더해진 도시락을 먹고 백운옥판차를 음미하는 시간. 준비된 듯 감홍빛 노을이 번지고 '좋아서 하는 밴드'의 귓속말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진다. 기타와 아코디언이 어우러진,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멜로디다. 차와 노래가 있는 저녁이 이토록 감미로울 줄이야. 
누구는 눈썹 같다 하지만, 영락없이 웃는 눈을 닮은 초승달을 보며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한 바퀴 돌고, 달빛한옥마을로 향했다. 월남사지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달빛한옥마을에는 28채의 한옥이 자리한다. 그중 10여 곳이 민박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가 묵은 곳은 보기 드문 복층 구조에 다실을 갖춘 휴휴당. 안주인이 자수를 놓은 고운 이불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차와 사색이 있는 풍경  

다음 날 아침, 전복과 미역국, 각종 나물과 젓갈로 차린 조식을 먹고 안쪽에 자리한 다실에 모여 앉았다. 반달 모양 사과와 방금 우린 녹차, 창밖으로 펼쳐진 월출산 봉우리들. 하룻밤 숙소로만 생각한 한옥에서 이렇게 근사한 아침 시간을 보내다니, 이조차 준비된 일정의 하나라면 더없이 사려깊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 달빛한옥마을을 떠나 월정사지에 모인 우린 강진군청에서 나온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월남소류지와 금릉경포대 등을 산책하고 다시 이한영차문화원을 찾았다. 달콤한 카스텔라보단 담담한 다식에 가까웠던 어제의 기억. '좋아서 하는 밴드'의 나무 실로폰 소리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강진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한식당 예향에서의 점심 식사다. 생선회와 홍어 삼합, 바지락무침과 전복구이, 떡갈비에 낙지볶음까지 남도 일미가 총출동한 메뉴로 성찬을 즐긴 후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섬세하고 다정했던 1박 2일의 여행. 숲과 길과 마을에서, 차와 달과 노래에 스며들며 사색에 잠겼다. 먼 시간을 돌아 나의 계절에 도착한 기분. 강진에서 차의 마음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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