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하

Memory of Travel
여행의 기억

여행지에서 포착한 순간에 기억과 이야기를 덧입히는 1 일러스트레이터 박용하와의 인터뷰

인터뷰어 표영소
인터뷰이·그림 박용하
사진 신규철
1 일러스트레이터 박용하는 카피 라이터 출신으로, 퇴사와 여행을 몇 차례 반복하다 여행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휴일을 파는 그림가게’라는 콘셉트로 온라인스토어 엔리케 샵을 운영하고 있다.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처음 그린 작품은 무엇이었나요?
스페인 북부의 산탄데르(Santander)라는 도시에 엘사르디네로 (El Sardinero) 해변이 있어요. 예전부터 왕족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에요. 도착하기 전에 미리 숙소를 예약했는데 막상 가보니 고속도로 대로변의 허름한 모텔이더라고요.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휑한 데다 시내와도 한참 떨어져 있었죠. 어쨌든 숙소를 나와서 뙤약볕을 맞으며 해변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문득 자괴감이 들더군요. 얼마나 대단한 바다를 보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어서. 그런데 도착해 보니 해변이 정말 아름다워서 그런 생각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쪽빛의 푸른 바다였어요.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틈 사이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외로움이 밀려들었어요.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 바닷속 깊숙이 들어갔죠. 그 기억을 담은 그림이 〈엘사르디네로〉입니다. 여행에 영감을 받아 처음 그린 작품인 동시에 제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해요.

원래 그림에 관심이 있었나요?

중학생 때 잠깐 미술부 활동을 한 게 전부예요. 그때 이후로 그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다가 다니던 광고회사를 퇴사할 때 아이패드를 샀어요. ‘낙서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그림으로 이어졌죠. 단순한 장면 묘사가 아니라, 스토리가 담긴 그림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이러한 작품 스타일은 카피라이터로 일한 경험과 관련이 있을까요? 여행을 할 때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스토리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고요. 그림을 그리고 2 전시를 해보니 그림 설명이 있어야 관객이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좀 더 구체적인 스토리를 생각하게 됐죠. 개인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과시하는 여행기보다는 타국에서 느낀, 누구나 생각해 봤을 법한 혹은 공감할 만한 감정을 담고 있는 여행기가 좀 더 와닿더라고요. 저 역시 작품의 스토리를 뽑아낼 때 낯선 장소지만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법한 보편적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비자의 입장에서 브랜드 경험에 관한 인사이트를 포착하는 게 카피라이터의 역할이니까요.

2 2021년 서촌에 위치한 복합문화 공간 어피스어피스(a piece a piece) 에서 ‘휴일(Holiday)’이라는 타이 틀로 첫 개인전이 열렸다.

작업하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작년 봄부터였는데, 불행히도 그 이후로는 여행을 가지 못했어요. 여행을 다닐 때는 그림을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지 않았거든요. 당시엔 그림을 그리며 살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웃음) 사진에 그림을 앉히는 작업을 주로 하는데, 그동안 찍은 여행 사진을 죽 펼쳐 놓고 여행 중에 쓴 일기를 훑어보면서 스토리를 찾아내곤 합니다. 만약 한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 100장이라면, 당시 경험 중 그림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 사진을 골라 작업하는 방식인거죠. 만약 일기의 내용과 딱 맞아떨어지는 사진이 없다면... 작품으로 나올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어떻게 탄생하나요?
무작위로 만들어냅니다. 여행에 관한 글은 사실에 기반하지만, 캐릭터는 사실 기반이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 그림은 일단 예뻐야 하고 재미도 있어야 하니까요. 사진 속 실제 이야기와는 별개로, 가족이나 아이, 연인 등 뽑아낸 스토리에 어울리는 캐릭터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넣고 있어요. 앞으로는 캐릭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정해볼까 해요. 주변에 옛 직장 상사나 동료 등 제 작업을 관심있게 지켜봐주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지금처럼 즉흥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말고, 몇몇 특정 캐릭터를 설정해 이름도 붙여주고 스토리도 만들면 어떠냐고 조언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래야 나중에 책이든 굿즈 등 확장 가능성도 생긴다고요.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찬찬히 준비해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그동안의 여행 히스토리도 궁금해요. 여행은 언제 처음 떠나게 됐나요?
첫 여행은 20대 중반에 1년 동안 다녀왔어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유라시아, 중동, 유럽을 둘러보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다시 배를 타고 속초로 넘어왔어요. 구체적 계획 없이 일단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거기서 비슷한 목적으로 여행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일정이 길어지게 됐죠. 학생 때라 돈이 많지 않으니 ‘비행기는 한 번도 타지 않겠다’ 생각하고 오로지 육로와 배로만 이동하다 보니 길어진 것도 있고요. 다음 여행지는 즉흥적으로 정했나요? 네. 도착한 여행지의 숙소에서 정보를 접하기도 하고, 헌책방에서 론리플래닛을 찾아보며 정보를 얻기도 했어요. 숙소도 현지에 도착해서 찾았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현지인을 사귈 기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여행부터는 어느 지역을 여행할지 큰그림은 갖고 떠났어요. 세부 일정은 마찬가지로 현지에서 정했지만.

두 번째 여행은 어땠나요?
30대 초반에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를 돌아보고 중남미를 여행했어요. 중미에서 과테말라, 멕시코, 쿠바를 둘러보고 남미로 넘어갔죠. 남미에서 7~8개월을 머물렀고요. 총 1년 반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와서는 우연한 기회에 카페를 운영하게 됐는데, 그 카페를 접고 3개월간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게 코로나 전에 다녀온 마지막 여행입니다.

평소 여행 스타일은 어떤가요?
단기 여행보다는 장기 여행을 선호해요. 최소 몇 개월, 길게는 1년 반까지. 구체적 계획을 세워서 떠나기보단 대략 어떤 도시를 가보고 싶다, 정도만 정해서 일단 출발합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상당히 열심히 돌아다녀요. 호텔이나 호스텔에 장기로 머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구석구석 다 다니죠. 그 지역에서 가 볼 만한 곳, 유명한 곳도 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가보고요. 숙소에서 느긋하게 쉬는 건 잘 못하는 편이에요.

그럼 숙소를 선택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시설은 크게 따지지 않아요. 그래서 주로 호스텔에 머무는 편이에요. 이제는 호스텔에 머물면 함께 묵는 친구들이 너무 연령대가 낮다는 게 살짝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요. (웃음) 그리고 도시보다 자연을 좋아합니다. 자연 풍광이 좋은 곳을 우선순위로 선택하고, 트레킹 같은 야외 액티비티도 많이하는 편이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트레킹 경험은 무엇인가요?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트레킹이요. 중간중간 캠핑을 하면서 3박 4일 동안 걸었어요. 흔히 ‘W코스’라 부르는데, 아래쪽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해 놓고 포인트(봉우리)를 찍고 다시 내려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또 다른 포인트를 오르는 방식으로 트레킹을 하기 때문이에요. 둘째 날 오른 브리타니코 전망대(Mirador Británico)에서 사방을 둘러싼 고봉들의 엄청난 위용에 압도되어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라본 기억이 납니다. 참고로,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마젤란이 남미에 도착했을 당시 만난 원주민들의 큰 발을 보고 마치 거인 같다 하여 ‘파타(pata, 발), 곤(gon, 큰)’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해요. 지명처럼 마치 열 서너명의 거인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풍광이 장관이었습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하이라이트는 넷째 날 방문한 라스 토레스(Las Torres, 삼형제봉)였죠. 해가 뜨기 전 플래시를 들고 한참을 걸어 올라 호수 앞에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는데, 주변이 밝아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래 그만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꼭대기부터 용광로를 쏟아부은 듯 시뻘겋게 익어가더라고요.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발 밑에 엽서를 깔고 간다’는 표현처럼, 눈앞의 모든 장면이 절경이었어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 자연의 느낌이랄까요. 자연을 좋아하는 저에겐 상당히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트레킹 중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인상적인 순간은 없었나요?
중국 4 호도협(虎跳峽) 트레킹 때였는데요. 대협곡을 지나는 차마고도(茶馬古道) 구간 약 16킬로미터가량을 1박 2일에 걸쳐 걷는 루트입니다. 협곡을 따라 진사강(金沙江)이 흐르는데, 길에서 내려다봤을 땐 유속이 완만해 보였거든요. 강변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살이 상당히 거칠었어요. 그때 사진을 찍다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자칫 사고를 당할 뻔 했습니다. 위협적인 물살에 순간 아찔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쪽 구석에 상류에서 떠내려왔는지 돼지 사체가 돌에 끼어 떠내려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모습도 떠오르네요.

3 연간 25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칠레 남부의 국립공원. 총면적 약 18만 헥타르로, 산악 지대와 빙하, 호수, 강을 아우르며, 하이킹 여행지로 인기 있다.

4 운남성 리장(丽江)에서 북쪽으 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 한 대협곡. 중국어로는 후타오샤 (虎跳峽)라고 부른다.

5 중국 서남부 윈난성과 쓰촨성에 서티베트를넘어네팔,인도 까지 이어지는 고대 교역로. 평균 해발고도 4,000km, 총길이 약 5,000km.

여행을 갈 때 꼭 챙겨 가는 소지품이 있나요?
첫 여행을 갈 때 손목시계를 샀는데 이후에도 여행 때마다 가져가는 물건 중 하나예요. 시계줄은 여행 중에 끊어져서 모로코에서 사서 바꿔 달았고요. 더 좋은 시계도 있지만, 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물건이라 항상 챙깁니다. 노트북도 항상 가져가는데, 여행하면서 노트북과 핸드폰을 몇 차례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작은 수첩도 하나 챙기고요. 주로 여행 정보를 적거나 짧은 메모를 하는 용도로요. 그리고카메라. 여행 중에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에요. 긴 여행일 때는 가벼운 디지털 카메라 하나만 챙기고, 일정이 비교적 짧을 때는 DSLR도 가져갑니다.

다시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
첫 번째는 멕시코 카리브해. 바다가 정말 멋있어요. 물속에 있으면 바다거북이 다가오기도 하고요.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과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두 번째로 브라질에 가고 싶어요. 브라질은 여행 막바지에 좀 지쳐 있을 때 방문해서 상파울루, 이과수, 리우데자네이루만 간게아쉬웠거든요.다시간다면그때안가본곳을둘러보고싶어요.세번째는이란입니다.이란국경을넘는야간 버스에서 현금을 전부 도둑 맞았어요. 수중엔 여행자 수표뿐이었는데, 현금으로 바꾸려면 테헤란까지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국경 마을의 버스터미널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저를 보고 한 이란 학생이 다가오더니, 자기도 동생을만나러 테헤란에 간다면서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버스표도 사줬고요. 테헤란에 도착해서도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정말 잘 챙겨줬어요. 헤어지면서 이란을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결국 못 만나고왔네요. 지금은그 친구를 찾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테헤란에서 여행자 수표는 바꾸셨나요?
아뇨. 제가 갖고 있던 여행자 수표가 아멕스였는데, 당시 이란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라 아멕스 수표를 받아주는 곳이 아무 데도 없더라고요. (웃음) 결국 터키로 넘어가서 환전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여행 이후에 바뀐 것이 있다면?
첫 여행 때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못해본 것이 많았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돈을 아끼려고 경험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더라고요.나를 위해 쓴 시간이 없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그 다음에 떠난 여행에선 첫 여행 때 못해본 걸 많이 한 것 같아요. 입장료가 비싸서 못 본 것, 저렴하게 끼니를 해결하느라 못 먹은 것.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미처 남기지 못했거나 사라진 여행 기록. 그래서 여행을 떠나면 매일매일 짧게라도 일기를 쓰려고 노력해요.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 가지 못한 여행지가 있다면?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에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려고 계획했는데, 못 갔어요. 다시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들입니다.

여행 이외에 영감을 받는 것이 있다면?
여행 외에는 영화와 책 정도인 것 같아요. 사실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스릴러와 서스펜스라서, 영감을 얻고 싶을 땐 일부러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이나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톰 포드(Tom Ford) 감독의 작품 같은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6 듀에인 마이클(Duane Michals)이나 7 헬뮤트 뉴튼(Helmut Newton), 8 사울 레이터(Saul Leiter)의 사진집이나 장 자크 상페(Jean-Jacques Sempé)의 그림책을 펼쳐보면서 아이디어도 얻고요. 

그렇다면 여행에 영감을 주는 것은?
퇴사. 현실 도피. (웃음) 가끔 론리플래닛 가이드북 같은 여행 책의 표지 사진을 보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특별히 어떤 것에 영감을 받아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지속 가능한 여행이란 무엇인가요?
여행지가 여행자의 것은 아니잖아요. 현지에 사는사람들, 그들의 후대, 혹은 후대에 여행을 할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현지를 훼손하지 않도록 여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는 현지인이 책임 의식을 갖고 자력으로 일상을 꾸려가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현지인을 존중하면서 최대한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막으로 여행의 좋은 점은 무엇일까요? 
20대까지만 해도 나라는 틀에만 갇혀 살았던 것 같아요. 나 아닌 다른 부분을 이해하는 과정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 과정을 거쳐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것 말이죠. 

6 미국의 사진작가(1932~ ). 카메라를 고정한 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포착하는 연속사진(photo-sequences) 작업으로 유명하다.

7 독일 출신의 사진작가(1920~ 2004). 금기를 깨는 노골적인 작업을 선보여 20세기 패션 사진의 거장으로 불린다.

8 미국의 사진작가이자 화가 (1923~2013). 1940년대부터 컬러 필름을 사용해 뉴욕의 거리 풍경과 일상을 주로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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