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치 바이 매거진

Subtraction and Addition 
빼고 더하기의 미학

작은 알맹이가 연결되어 송이를 이루는 포도처럼 서로를 해치지 않고 작은 조직이 연결되어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 그레이프랩의 김민양 대표를 만났다. 

박진명
인터뷰이 김민양 (그레이프랩 대표)

카카오 초창기 멤버였던 김민양 대표는 퇴사 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에서 여행을 통한 다양한 경험과 내면의 자아 성찰, 지속 가능성에 대한 배움을 안고 귀국해 2018년 ‘그레이프랩'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레이프랩은 재생 종이로 만든 노트북 거치대와 무드등, 플래너 등 환경에 무해한 제품을 만드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발달장애 아티스트와 협업하고 정규직으로 장애인을 필수적으로 채용하는 등 회사 운영 전반에 있어서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환경을 해치는 기술은 빼고 그동안 쉽게 지나쳤던 사회적 소외계층을 더하는, 빼고 더하기의 미학을 실천하는 김민양 대표를 그레이프랩이 운영하는 카페 ‘어피스오브’에서 만났다. 

메모 1.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향한 여정 

카페에 비치되어 있는 그레이프랩의 제품을 살펴보니 모두 가볍고 수납력이 좋아 여행에 들고 가기 딱 좋을 것 같아요. 
맞아요. 종이로 만든 노트북 거치대는 무게도 가볍고 저희만의 접지 기술을 적용해 매우 콤팩트하죠. 재생 용지로 만든 먼슬리 플래너는 실제로 제가 여행 중에 들고 다닌 수첩의 불편한 점을 보완하고 필요했던 부분을 더해 만든 제품이에요. 

평소 여행을 좋아하나요?

영국에서 유학할 때 여행을 많이 했어요. 모로코, 터키, 크로아티아 등으로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위한 리서치 여행을 떠났죠. 그중 모로코는 여섯 번이나 방문했어요. 주로 시장이나 오지에 있는 수공예 장인을 만나러 다녔는데요. 시장에서 일하는 장인은 상인 뒤에 앉아 묵묵히 물건을 만들고요. 오지에선 외출이 어려운 부녀자들이 집에 모여 앉아 이것 저것 만들더라고요. 

여행자는 잘 가지 않는 현지의 외딴 곳까지 찾아다니는 게 위험하고 힘들었을텐데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저 혼자는 위험하기도 하고 잘 모르니까 그 지역의 비영리 단체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단체 관계자와 결이 잘 맞으면 도움이 많이 돼요. 여기서 중요한 건 인증된 비영리 단체인지 잘 판단해야 하고, 아닐 경우의 리스크도 잘 파악해 대응해야 합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잘 맞는 관계자를 만나 트럭을 타고 정말 구석 구석 많이 다녔어요.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이었죠. 

영국으로 돌연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카카오 설립 초기, 제 주도 하에 이모티콘 서비스 오픈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유저들과 더욱 활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강풀, 이말년, 노란구미, 낢, 네 명의 웹툰 작가를 섭외해 이모티콘을 만들었어요. 그때 회사에 수익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산이 넉넉치 않았는데, 파격적으로 작가들에게 5:5의 수익 배분을 제안해 진행한 프로젝트였어요. 이모티콘 서비스가 지금은 굉장히 보편화되었지만 그 당시엔 저희에게도, 작가들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죠. 아니, 실험에 가까웠다고 생각해요.(웃음) 
다행히도 오픈하자마자 엄청난 반응이 쏟아졌어요. 가장 큰 변화는 그때를 기점으로 웹툰 작가도 정당하게 수익을 보장받고 일하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당시만 해도 웹툰 작가의 수입이 높은 편은 아니었거든요. 제가 기획한 서비스로 업계의 구조가 바뀌고 누군가의 처우가 나아질 수 있던 거예요. 이 경험을 통해 굉장한 영감을 받았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돕고 싶었어요. 좀 더 깊이있게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됐죠. 

리서치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모로코에 갈 때 마다 생각하지 못한 변화와 가능성이 보여서 정말 재미있었는데요. 당시 제가 준비하던 사업 내용은 그레이프라는 프로토 타입을 이용해 장인이 직접 시장의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 거였어요. 아무래도 제3 세계는 문맹률이 높으니까 글씨 대신 아이콘을 넣어 직관적이고 쉽게 만들면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어요. 대학원 친구들은 나이가 많은 장인 대부분이 오랫동안 자신만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어 새로운 시도를 망설일 거라고 말리기도 했죠. 그런데 다들 예상 외로 굉장히 오픈 마인드를 갖고 있더라고요. 모르면 아들한테 배워서 할 거라며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밝혀서 굉장히 깜짝 놀란 적도 있어요. 
과연 모바일 기반의 인터넷 접속이 가능할지가 미지수였는데, 그 무렵 아프리카 IT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어요. 사막 한 가운데 거주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휴대폰을 사용하고 인터넷 접속도 가능하더라고요. 

결과는 어땠나요? 
마지막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어요. 장인들은 개인 계좌를 개설할 수 없다는 거예요. 모로코에서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엘리트 계층만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더라고요. 핀테크 등의 기술이 도입된 지금이라면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어요. 누구의 계좌에서 돈을 받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더라고요. 

메모 2. 지속 가능성의 특색이 짙으면 지루하고 가르치려든다는 편견과 싸우다

그 시기의 여행이 지금의 사업과 연결 고리가 있을까요? 
그레이프라는 이름도 모로코에서 만든 이름인데요. 초기 그레이프의 형태는 어플리케이션이었어요. 그때는 모바일, 디지털 기반의 플랫폼이었다면 지금은 아날로그 기반의 플랫폼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제품 하나하나가 제가 생각했던 구조의 플랫폼으로 연결된 거예요. 지금 그레이프랩은 발달장애인들의 아티스트 그림을 넣어 그들에게 최우선으로 수익이 배분되도록 하는 구조를 형성했어요. 스타일이 다를 뿐 기본 철학은 예전과 다름 없죠. 

디지털 최전선에 있다가 대척점에 서 있는 아날로그 디자인으로 왔어요. 
사실 영국 유학길에 오를 때만 해도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영국 학교에서는 토론 수업이 굉장히 많거든요. 먼저 제 생각을 발표하고 사회 문제를 정의하는 등의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대학원 동기들이 저한테 왜 맨날 디지털, IT 기술, 비즈니스 얘기만 하냐고, 기술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진 않냐는 거예요. 그 대목에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죠. IT 기술은 제게 너무 당연한 얘기였는데 친구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들은 날부터 기술을 빼고 디자인을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예를 들면 전기가 없어도 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하게 된 거죠. 계속해서 기술을 빼는 작업을 하다 보니 종이까지 온 거예요. 

기술을 빼니 환경 문제에 관심이 생긴 건가요? 
런던에서 샌드위치를 먹는데, 패키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브랜드는 환경을 위해 냉장 환경 유통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신선하게 먹어야 한다는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뉘앙스였어요. 냉장 유통한 것만큼 신선하진 않아도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우리는 항상 가장 최상의 것만 취하려 한다는 거죠. 그 욕심은 환경 오염으로 돌아오고 있고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회사를 다닐 때 고객을 위해서 최고의 품질을 가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뒤에서 희생되고 있던 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거예요. 그 패키지의 문구를 봤을 때 경외심까지 들더라고요. 

회사를 설립한지 5년차가 되었는데, 제품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었죠. 물론 처음에 제품을 와디즈에 오픈했을 때 반응이 폭발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환경 얘기를 꺼내기 힘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환경 문제를 논하는 건 지루하고 가르치려고 든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환경 이야기는 뒤로 하고 디자인만  강조했어요. 그러다 보니 ‘디자인이 예뻐서 샀는데, 환경에도 무해하다'는 반응이 생겼죠. 유저들의 호감을 사며 차근차근 발전하고 있어요. 

메모 3. 친환경 소재를 쓰는 것만이 지속 가능한 디자인은 아니다

회사 직원 절반 이상이 장애인이라고 들었는데,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희는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6명의 장애인과 3개월마다 한 번씩 수익을 제공하는 5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실 환경보다 장애인 이야기를 하기가 더 어려웠어요. 지금도 어렵고요. 초반에는 장애인 지원 사업을 하면 정부에서 보조금을 많이 받냐는 말을 가장 먼저 듣곤 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스마트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죠. 

장애인과 함께 일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장애인이 안정적인 경제 활동을 하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장애인 복지관을 찾았어요. 저는 미술 교육을 받을 때부터 디자이너가 되어 사회 생활을 할 때까지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살았어요. 모든 게 경쟁이었고 좋지 않은 결과물을 세상에 내놨을 때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말할 수 없이 커서 늘 압박감에 시달렸죠. 그런데 어떠한 미술 교육도 받지 않은 발달 장애인들이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는데, 손이 너무 자유로운 거예요. 부담을 내려놓고 그리는 그림은 마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듯 했어요. 저 역시 그들의 그림을 보면서 손과 발이 유연해졌고요. 제가 제품 디자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용기와 자신감도 생겼죠. 
장애인의 사회 참여는 다양성 확장에 기여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획일화된 능력을 가진 사람, 혹은 평균  이상의 수준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애쓰잖아요. 다양한 경험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감성과 커뮤니케이션은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세요. 
이번 하반기에 디자인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기업의 ‘리모트 워커 키트’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어요. 공간에 제약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아이템으로 구성된 키트예요. 기업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활용한 협업도 준비하고 있어요. 기업의 폐기물 소스를 제공받아 제품화시키는 순환 고리를 장기적으로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메모 4. 그레이프랩의 노트북 거치대는 50그램이 되지 않는 종이다. 어떻게 최대 5키로의 무게를 견딜 있을까. 김민양 대표의 말에 의하면, 접지에 생긴 여러 축이 다리 역할을 무게 중심을 분산시키는 것이 핵심 원리다. 그레이프랩이 국내외에서 인증받은 특허 기술만 30 .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의 역할은 얼마나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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