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팜의 에어룸 토마토

 

ⓒ 그래도팜

What’s your favorite tomato?
어떤 토마토를 좋아하세요?

그래도팜의 원승현 대표는 ‘어떤 맛이 나는 토마토를 좋아하나요?’라는 질문이 오가는 미래를 꿈꾼다. 토마토에 한 가지 맛만 있는 건 아니니까.

인터뷰어 박진명
인터뷰이 원승현(그래도팜 대표)

어느 날 갑자기 SNS에 ‘에어룸(heirloom)’ 토마토 레시피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도 솔직히 에어룸 토마토의 맛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토마토 맛이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저 이색적인 생김새에 잠시 유행처럼 눈길을 끄는 거라 치부했다. 에어룸 토마토가 유전자 조작을 거치지 않고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맛이 궁금해졌다.
강원도 영월에 자리한 그래도팜은 수확한 열매에서 씨앗을 얻는 자가채종 방식으로 30여 종 이상의 에어룸 토마토를 재배한다. 4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유기농법 노하우를 더해 생산하는 토마토는 전부 다른 색과 맛, 향을 가졌다. 그래도팜은 몸이 약한 아내를 위해 남편이 1983년부터 일궈온 유기농장이다. 2015년, 브랜드 디자이너 출신인 그의 아들이 그래도팜이라는 이름으로 농장을 새롭게 브랜딩했다. 아들은 남들 하는 대로 편하게 농사짓자는 자신의 말에 ‘그래도 그럼 되겠냐’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부모님의 대답에서 브랜드의 정신과 이름을 가져왔다. 그래도팜의 토마토에는 타협과 절충없이 먹거리를 만드는 기본 원칙을 지키며 농사를 지어온 부모님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4월의 토마토 농장 풍경이 궁금해요. 지금 어떤 시기인가요?
온실 안에는 지난겨울 파종한 토마토가 허리만큼 자라 열매를 맺었고 실외 정원에는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았어요. 해가 점점 길어지면 농장도 바빠져요.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몸은 더 고단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보면 흐뭇한 마음이 앞서죠.

현재 운영하는 브랜드 땅의 기록과 토마로우를 소개해 주세요.
땅의 기록은 저희가 생산하는 토마토와 비트 등을 판매하는 농산물 브랜드인데요. 농산물은 1983년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땅에 헌신한 부모님의 노력과 그간의 수많은 계절 그리고 자연의 섭리가 만든 기록물이라는 생각에서 탄생했어요. 유기농으로 재배한 기토(방울토마토)와 토마토 순종의 에어룸, 비트, 삼나물, 참취나물 등 다양한 제철 상품으로 구성했죠.
토마로우는 지속 가능한 농업을 지향하는 서비스 브랜드예요. 현대 농업이 직면한 지속 가능성과 다양성,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췄어요. 토마토(tomato)와 내일(tomorrow)를 합쳐 이름을 지었죠. 단순히 맛있는 생산물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농업의 숨은 가치를 공유하고, 땅의 중요성과 품종의 다양성 등 지속 가능한 농업을 향한 과정을 함께 알리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그래도팜 한 편에서 토마토를 중심으로 한 전시, 도서관, 미식 경험 서비스 등을 운영하는 토마로우를 통해 한층 더 깊이 토마토 농사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어린 시절엔 농사짓는 걸 싫어했다고 들었어요. 브랜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농장으로 돌아온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직을 준비하면서 부모님의 농장 브랜딩을 가볍게 도와주는 일을 했어요. 직접 부모님을 인터뷰하면서 두 분이 일생을 바쳐 일군 농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어요. 그동안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을 자책할 정도로 큰 울림을 받았죠.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지켜본 제가 유기농의 진정한 가치를 많은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갖게 되더라고요. 한편으론 제 브랜드를 만들어 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어 용기를 냈어요.
브랜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브랜드를 하나의 생명체로 다루는 태도라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그러려면 제가 농업을 확실히 알아야 했죠. 결국 농장 창업까지 감행했어요. 부모님의 일손을 거드는 것보다 직접 농장을 운영해봐야 진솔하고 효과적인 브랜딩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죠.

그래도팜을 브랜딩하면서 가장 많이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요?
현대인은 대부분 농업에 친숙하지 않잖아요. 알게 모르게 부정적 이미지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농업은 촌스럽고 힘든 게 아니라, 세련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끔 신경 썼어요. 농부의 사무실을 예쁘게 꾸미고 농장의 동선도 깔끔하게 정비해 어린 아이들이 이곳에서 농부를 꿈꿀 수 있으면 했고요. 동시에 평생 농사일에 헌신한 부모님의 노동 가치가 퇴색되지 않는 데 중점을 뒀죠.

농장이 오랫동안 지켜온 고유의 가치를 흔들림없이 유지하면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저희 농장의 슬로건이 ‘타협하지 않고 지켜낸 결실’이에요. 타협하는 순간, 농장의 아이덴티티가 무너진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이라도 그래도팜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나 가치에 반한다면 단호하게 포기해왔어요. 사실 큰 기회를 거절하면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올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40년 넘게 ‘그래도’를 외친 부모님의 노고를 떠올리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에어룸 토마토 덕분에 그래도팜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유전자 조작을 거치지 않은 순종 에어룸 토마토를 재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토종을 구식 혹은 비효율적인 씨앗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지역 풍토에 적응해탄생한 토종은 매우 특별하고 귀한 존재예요. 생산성을 이유로 이 땅에 만연한 F-1 하이브리드 품종은 교잡종의 특성상 일회성 농사만 가능하거든요. 땅에 정착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해마다 새로운 씨앗을 심는데, 유전형질이 고정되지 않은 종자는 몇 해가 지나도 지역 풍토와는 연결고리가 없는 셈이죠.
반면 열매에서 씨앗을 거둔 순종 종자(토종 포함)의 경우, 땅에 적응하면서 고유한 특성이 생겨요. 결국 씨앗과 지역의 관계성이 농업의 미래에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 순종 재배를 시도하게 됐죠. 현재 농업 시장은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팜의 토양 관리 노하우를 슬쩍 귀뜸해 준다면.
사실 국내 농경지는 대부분 농사를 짓기에 좋은 토양이 아니에요. 농사에 적합하면서 오래된 토양이 얼마 없거든요. 우리나라 농업이 전세계에서 화학 비료 의존도가 높고, 토양은 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인데 말이죠.
그래도팜은 악조건의 토양을 개선하는 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해마다 유기물을 직접 발효하고 미생물을 배양하는 등의 토양 관리에 집중하면서 식물 생장에 유리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이를테면, 잘게 부순 참나무 껍질을 발효해 만든 천연 퇴비로 이온(양분과 수분)을 잡는 힘을 키워주는 등 미생물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거죠. 건강하고 힘 있는 토양에서 자란 식물은 확실히 더 맛있고 좋은 향이 나거든요.

지속 가능한 토마토 농사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앞서 언급한 토양 순환이 가장 우선이고, 그다음으로 종자 관리에 집중하고 있어요. 토마토 씨앗은 채종 후 5년까지 사용이 가능한데요(물론 그 이상도 가능하지만, 5년 이내로 사용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씨앗을 확보할 수 있으니 종자가 도태될 일이 없고 예측하지 못한 위기 상황에 대비할 수도 있어요.
토마토와 관련해 좋아하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아름다운 풍광과 맛 좋은 토마토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남부 베수비오(Vesuvio) 화산 지역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그 지역에서만 나는 ‘피에놀로 델 베수비오(piennolo del vesuvio)’라는 품종이 있어요. 생과로도 먹지만, 그늘에서 1년간 건조하면 강한 산미가 느껴지고 쌉싸름하고 오묘한 맛이 나요. 그 토마토 때문에라도 다시 가고 싶을 정도죠.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있다면?
여행을 가면 토마토 농장을 일부러 찾아가는 편인데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즐겁고 뿌듯한 경험이에요. 유럽이나 미국, 일본은 많이 가봤는데, 정작 토마토의 원산지 남미에 갈 기회가 없었어요. 페루 지역의 안데스 산맥에서 자란 야생의 토마토를 접해보고 싶어요.

토마토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지속 가능한 삶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토양은 무한 자원이 아니에요. 농업에 유효한 유기물층을 10센티미터 만드는 데 2,00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는데, 해마다 240억 톤의 토양이 사라지고 있죠. 세계토양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2050년에는 농경지로 사용할 수 있는 토양이 현재의 절반일 거라고 해요. 토양은 여느 광물질보다 우리의 삶에 훨씬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살아 숨 쉬는 토양과 이를 보존하는 농법, 그 안에서 탄생한 다양한 먹거리에 관심을 두는 소비자가 많아져야 우리의 삶도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지금 우리나라 농업에서는 생산성이 경영 성과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에요. 또, ‘단일 작목 단일 품종 재배 방식’을 공식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농산물을 점점 더 사료화하고 있죠. 
생물학에서는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잖아요. 여기서 사피엔스는 ‘맛보다(sapere)’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해요. 그만큼 맛을 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저마다의 취향이 존재해야 품종이 다양하게 유지된다고 생각해요. 잘 키운 작물의 다양성과 맛의 취향을 찾아가는 저희의 시도가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다른 농가도 이런 도전에 동참하고, 나아가 획일화된 대한민국 농업 시장에 다양성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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