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스틱 베이커리 서울

Baking In Plastic
플라스틱을 구워드립니다

플라스틱 제빵사 박형호는 오늘도 어디에서 왔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병뚜껑을 분쇄해 오븐에 녹인 다음, 카눌레나 와플, 타르트의 형태로 굽는다.

박진명
인터뷰이 박형호(플라스틱 베이커리 서울 제빵사)

연례의식처럼 연말이 되면 다음 한 해를 함께할 캘린더를 구입한다. 지난 연말에는 토끼 모양의 귀여운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플라스틱 베이커리 서울에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판매한 제품이었다. 검은색, 흰색, 회색의 병뚜껑을 녹여 검은 토끼를 만들었다는 내용을 보고 홀린 듯 결제를 완료했다. 플라스틱을 와플이나 카눌레처럼 찍어내는 베이커리 콘셉트를 보고 있자니, 이런 발상은 어디서 나왔는지, 소재의 한계는 없는지 따위의 질문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결국 박형호 제빵사를 직접 만나 그가 알려주는 플라스틱 베이킹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데…

참고 사항 : 박형호 제빵사는 플라스틱 베이커리 서울을 줄여서 ‘플베’라고 부른다.

플라스틱을 굽는다는 발상이 재미있어요.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요?
주어진 상황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원래 플라스틱을 녹일 때 사용하는 사출기가 꽤 비싸거든요. 당시 함께 일하던 친구가 오븐을 갖고 있었어요. 그걸로 플라스틱을 녹이고, 베이킹틀로 모양을 내봤어요. 철로 만든 데다 코팅까지 되어 있으니 녹인 플라스틱으로 모양을 내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였죠. 여담인데, 친구와 오래 일하고 싶어 베이킹 쪽으로 접근한 것도 있어요. 요리를 좋아하는 친구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미끼를 던진 거죠.(웃음) 콘셉트는 자연스럽게 정해졌지만, 확신은 있었어요. 플라스틱을 다룰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은 지금이다, 라는.

그 친구와는 아직도 함께 하고 있나요?
아니요. 취업했어요. 붙잡으려고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는데 말이죠.(웃음)

이름 뒤에 ‘서울’을 붙인 이유가 궁금해요.
플베를 준비하면서 패션과 맥락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 ‘옷을 잘 입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밖에서 보는 시선과 제작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버무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패션 브랜드 버버리 런던, A.P.C 파리처럼 붙여봤어요.(웃음) 지역성도 표현하고 싶었고요.

평소 업사이클링에 관심이 많았나요?
환경 보호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버려지는 것에 미련이 많았어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좋아했고요. 2013년 즈음, 휴지심을 잘라 스피커를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그때 본격적으로 업사이클링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죠. 다만 당시에는 업사이클링 관련 시장의 규모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당장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회를 노려야겠다는 마음이었달까. 이후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해 결국 여기까지 이르게 됐죠.

요즘은 ‘업사이클링 아트’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어요.
맞아요. 지금이 제가 기다리던 바로 그 타이밍인 건 확실하죠.(웃음) 플베를 만들고 나서 가장 먼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 올려 제품을 공개했거든요. 목표는 단 하나였어요. 이 아이디어로 특허를 내긴 어려울 수 있지만, ‘베이킹’이라는 콘셉트는 선점하고 싶었어요. 펀딩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시도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해요.

제품을 디자인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사실 최근에는 디자인보다 제품 제작을 최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플라스틱으로 빵을 표현하기엔 색상이나 디테일에 제약이 많은데, 그 동안 베이커리라는 브랜드적 관점에 갇혀 쉽게 포기를 못했던 것 같더라고요. 브랜드의 종착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디자인은 플베만의 느낌만 담는 것으로 충분하니, 대신 제작을 시스템화하는 데 집중해야 겠다’는 답이 나오더라고요.

밖에서 바라봤을 때, 플베의 정체성이 ‘디자인 스튜디오’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보면 제작도 디자인의 일환이니까요. 예전에는 남들이 보기에 어려운 디자인이 좋았는데, 지금은 쉽게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일차원적으로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플라스틱 병뚜껑의 색을 섞어 생긴 패턴도 플베만의 감성이라고 생각해요. 원래 병뚜껑은 색깔별로 분리하지 않으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일반적으로 규모가 있는 기업에서는 제품에 조금이라도 색이 섞이면 하품으로 취급하는데요. 자원을 리사이클링하는 소규모 공방에선 오히려 그게 장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저희가 하는 일 자체를 좋은 의미로 이해해주니까 소재 활용에 제한을 두지 않고 마음껏 시도할 수 있더라고요. 반면, 산업으로 연결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프로젝트의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제품의 일정한 규격과 퀄리티를 보장하기 어려워지니까요.

병뚜껑을 다루면서 이런저런 한계에 봉착할 때도 분명 있겠죠.
엄밀히 말하면 ‘병뚜껑 재활용’에도 허점이 있어요. 병뚜껑만 따로 수거해서 재활용할 경우 상대적으로 페트병 재활용율은 낮아지거든요(기본적으로 페트병은 병뚜껑을 닫아서 분리 배출해야 한다). 또 쓰레기 재활용보다 생산 공장에서 발생하는 폐기물 문제가 더욱 시급하기도 하고요. 사실 플베의 수명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어요. 진입 장벽이 낮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는 분야죠. 플베를 시작할 때, 저희보다 먼저 와플 기계로 플라스틱을 찍어봤다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이제 병두껑 말고 다른 소재로 옮겨갈 단계라고 생각해요. 요즘 생각하고 있는 건 유기농 물질이에요. 유기물질을 연구하는 한편, 플베가 그간 쌓아온 제작 기술을 시스템화해 다양한 콘텐츠로 보여주면 어떨까 해요.

작년 한 해에는 록시땅, 모나미 등의 브랜드, 지자체 등과의 협업으로 많이 바빴을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하게도, 크고 작은 프로젝트가 많았어요.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야금야금 늘고는 있었는데, 록시땅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하고 나선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입소문 덕에 야외 행사 뿐만 아니라 브랜드 한정판 제작, 전시 등으로 플베의 가치를 널리 알릴 기회가 생겼죠.

작년 한 해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서울디자인페스티벌2022>에 종이 펄프와 송진을 키워드로 참가했어요. 주제는 ‘당신이 가진 쓰레기를 이렇게 예쁘게 만들 수도 있다’였고, 100퍼센트 생분해, 그러니까 완전 자연 물질로만 최적화하는 것이 포인트였죠. 찻잎이나 귤 껍질을 송진과 섞어 타일로 완성했고, 종이 펄프에 전분 가루를 섞어 만든 책을 구조물로 세워 가구를 제작했어요. 앞으로도 유기물질의 활용도를 참신하면서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업으로 성장하고 싶어요.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먼저, 1월에 좀 더 크고 넓은 곳으로 작업실을 이전합니다. 을지로 대림상가에 있는 현재 작업실은 2월부터 워크숍 공간으로 활용해보려고 계획 중이에요. 올해는 함께 일할 친구를 꼭 찾고 싶고, 회사 규모가 딱 1.2배 정도 커지기를 소박하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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