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에서 그린 드로잉과 도예 작품을 전시한 한차연 작가

 

ⓒ 한차연, 제너럴 그래픽스, 김윤경

Drawing Another Me
종이와 흙에 새긴 또 다른 나

드로잉 작가 한차연 * 은 종이와 흙 위에 또 다른 자신을 새긴다. 그 순간의 바람과 햇빛, 모래알, 파도 소리도 모두 함께.

인터뷰어 박진명
인터뷰이 한차연
사진 김윤경
* 일러스트 작업을 하다가 2021년부터 도자기와 페인팅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는 삶’(텅, 2022), ‘WAY HOME’(삼세영 미술관, 2022), ‘그림이 된 순간’(엠컬렉트 나인틴 갤러리, 2023)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그린 그림을 전시한 개인전 ‘그림이 된 순간’이 끝났어요. 소회가 궁금해요.
이제서야 여행을 끝낸 기분입니다. 고성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제 안에 있던 것을 모두 꺼내고 나니, 이제 정말 고성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로운 작업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지난봄, 고성으로 여행을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서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인지 한적하고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지역을 좋아하거든요. 간간히 짧은 스케치를 하러 고성에 가곤 했는데, 이번엔 2주간 머물게 됐죠.

몇 번의 붓질로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 마주했을 법한 장면이 표현된다는 게 신기해요. 단순하게 그리는 것이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일부러 단순하게 그리려고 한다기보다 제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단순한 것 같아요. 그림에는 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날 뿐이죠.

해가 질 무렵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 많은데,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인가요?
고성에서는 특히나 그 시간에 그림을 많이 그린 것 같아요. 고성을 여행하는 내내 쓸쓸한 분위기가 특히나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제 기분이 줄곧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그때 많이 외로웠거든요.

이번 전시 작품 중 〈자화상〉도 외롭고 쓸쓸한 기분을 표현한 건가요?
흐린 바닷가 앞에 서 있는 제 모습이에요. 얼굴만 클로즈업해 푸른 바닷빛으로 채색했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날의 얼굴이라 군데군데 다양한 색을 사용했어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요?
집에 가고 싶다, 고양이 보고 싶다?(웃음) 사생(寫生)은 그 장소,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저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는 건 그곳에 서 있는 저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언제부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나요?
오랜 시간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작업이 돈 버는 수단으로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번아웃이 온 거죠. 2017년부터 제주도에서 1년 반 정도 살면서 그림만 그리기로 결심했어요. 그때부터 사생을 즐기게 됐죠. 사실 야외 스케치가 어렵거든요. 가끔 친한 작가를 데리고 스케치 여행을 가곤 하는데, 처음엔 낯설어 잘 그리지 못해요. 날씨나 주변 상황 등 작업을 방해하는 외부 요인이 많고 반듯한 책상도 없으니 삐뚤빼뚤하게 그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루이틀 지나고 서서히 손의 감각을 찾기 시작하면서 재미를 느끼더라고요. 방 안에서는 그릴 수 없는 그림이거든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작업 방식이 궁금해요.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스케치를 하고 이후에 페인팅을 하거나 다른 작업이 더해지는 건가요?
스케치 여행을 할 땐 작은 드로잉 노트와 유성펜을 가방에 늘 챙겨 다녀요. 그리고 싶은 풍경이 보이면 언제든 멈춰 서곤 하죠. 물감도 한두 가지 색만 간단히 챙겨 다니는데, 고성에서는 비교적 길게 머물렀기 때문에 다양한 재료를 잔뜩 챙겨갔어요. 바닷가에 자리를 깔고 앉아 종이에 유화 물감으로 그려보기도 하고, 낮에 산책하며 그린 드로잉을 숙소에 돌아와 여러 가지로 채색하기도 했어요. 대부분의 드로잉은 고성에서 그렸고, 이번에 전시된 유화 작품과 도자기는 서울에 돌아와 완성했죠.

여행에서 만난 장면을 그림에 담을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나요?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펜을 들어요. 다양한 장면을 담으려 일부러 노력하기도 하는데요. 나중에 돌아와 스케치북을 펼쳐보면, 제가 어떤 것에 특별히 마음이 동하는지 외려 그림을 통해 알아차리곤 해요. 해 질 녘,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 누군가의 뒷모습, 집과 골목길, 쓸쓸한 풍경에 마음에 기우는 것 같아요.
간단한 스케치를 완성하는 데 보통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저는 작업 속도가 빠른 편이에요. 드로잉 작업 자체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뿐더러 화풍도 단순해서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아요. 작업 시간은 짧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손과 마음을 예열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곤 하죠.

워밍업에도 루틴이 있는지?
사실 드로잉만으로 경직된 손과 마음을 푸는 데 도움이 되긴 해요. 저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페인팅과 도자기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데, 드로잉 덕분에 힘을 빼고 작업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아요. 덜어내고 덜어내 핵심만 남은 그림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계기로 도예와 페인팅을 함께 하게 됐나요?
조소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어요. 조각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냥 흙을 만지는 게 좋았어요. 디자인학과로 전과해 졸업 후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도 늘 흙의 감촉을 그리워했던 것 같아요. 도예를 취미로만 하고 싶어서 일부러 조형 작업은 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하고 싶은 것이 생겨 조금씩 해보고 있어요.

두 작업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제 몸의 일부인 손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창작자의 입장에서만 말하자면, 두 작업 모두 애초의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거나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 생길 때가 있거든요. 그 또한 매력인 것 같아요.
작품에 잔을 든 사람, 강아지, 고양이가 주로 등장하는 것 같아요.
술과 커피, 동물을 좋아해요. 요즘엔 고양이 그림을 많이 그리는데, 반려묘 월양이 덕분인 것 같네요. 제주살이할 때 집 앞에서 매일 밥을 주던 고양이인데요. 제주를 떠날 때 눈에 밟혀 결국 데려왔어요. 고성에서 집에 있는 월양이를 그리워하던 감정을 담아 만든 작품도 여럿 있어요. 제가 누워 있으면 제 위로 올라오곤 하는 월양이를 떠올리며 만든 〈꿈꾸는〉이라는 작품도 그중 하나죠.

술잔과 위스키 병을 만드는 작업도 재미있어요.
위스키를 좋아하거든요. 사실 전시를 하려고 만든 건 아니고, 혼자서 위스키 병을 모티프로 화병과 술잔을 도자기로 만들었어요. 그걸 모아서 ‘짠’(보연정, 2022)이라는 전시를 열기도 했죠. 자화상도 많이 그리더라고요. 가장 좋아하는 본인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평소 자는 걸 좋아해요. 잠자는 모습을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요. 저 작품 〈꿈꾸는〉에서도 누워있잖아요(웃음). 잠자고 꿈꾸며 회복하는 것을 주제로 ‘꿈꾸는 사람’이라는 조형 전시도 계획하고 있어요.

작품 세계에 영향을 준 인물이나 장소가 있다면?
2년 전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셨어요. 병상에 누워 계시는 4년 동안 제가 병간호를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림을 아예 그리지 못하던 시기도 있었죠.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오일 페인팅을 시작하게 됐어요. 원래는 드로잉에 먹을 더해 작업하곤 했거든요. 섬세한 감정 표현을 색으로 채워보니 작업의 폭도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작업이 잘 안 풀리거나 흥미를 잃는 순간은 없나요? 그럴 땐 어떻게 극복하나요?
물론 있죠. 그런 날엔 좋아하는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연필을 들곤 해요. 정도가 심한 날엔 그냥 안 해요. 전에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불안했는데, 요즘은 그리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한 발 멀리 떨어져 스스로를 지켜보는 것도 작업의 일부인 것 같아요. 그리고 뭐든 영원한 건 없잖아요. 하기 싫은 감정도, 작업이 잘 안 풀리는 날도 다 지나가더라고요. 그럼 다시 또 작업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고. 창작자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아요. 부디 그런 순간이 길지 않길 바랄 뿐이죠(웃음).

일상을 소재로 그리다 보면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요.
그럴 때 여행을 떠나죠. 사실 저는 낯선 환경을 즐기는 편이 아니에요. 오히려 긴장하고 말수도 줄어들거든요. 드로잉은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돼요. 풍경을 느리게 응시하다 보면 종이에 물감이 번지 듯 서서히 여행지에 몰입할 수 있죠. 익숙했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결혼식을 올리는 대신 네팔 안나푸르나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7일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ABC)까지 트레킹을 했는데, 기온이 하루에도 몇 번씩 겨울과 여름을 오가고 수시로 비가 내리더라고요. 고산 증세에 로지 시설도 열악해 정말 힘들었어요. 다시 가라고 하면… 모르겠어요(웃음). 그런데 그곳에서 마주한 낮과 밤의 설경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히말라야에 올라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죠. 조명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설산을 비추는 달이 특히나 인상적이었어요. 그때 그린 드로잉을 엮어 첫 독립 출판물을 발행하기도 했어요.
이번 전시에서도 드로잉 노트를 출간했더라고요. 그림 옆에 달린 짧은 코멘트가 인상적이었는데, 글쓰기를 좋아하나요?
책이라는 물성을 좋아해요. 개인전이 끝나고 나면 종종 전시 드로잉과 제 짧은 단상을 엮어 독립 출판물로 발행하거든요. 글은 그림보다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쓰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주로 순간의 감정을 기록하는 편이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담백하게 표현하려 해요. 제 그림처럼 말이죠.

가보고 싶은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내년엔 아마 몽골에 갈 것 같아요.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가게 된다면 몽골의 한적한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옛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릴 거라는 것만은 확실해요(웃음).

여행지에서 나만의 루틴이 있다면?
아침에 산책하는 걸 즐기는데요.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풍경을 낯선 사람의 맨얼굴을 보듯 관찰하는 시간을 좋아해요. 이번에 고성에서는 매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막국수를 먹었어요. 고성군에 있는 막국수 맛집 중에 안 가본 곳이 없을 걸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올해 초 명상센터에 다녀왔는데 바쁘게 지내느라 명상도 잊고 살았어요. 종교는 없지만 연말에는 템플스테이에 참여해 명상도 하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작정이에요.

그림도 그릴 건가요?
아니요. 거기선 아무것도 안 할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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