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겐트의 도시 커먼즈

Four Scenes from My Belgian Journey
벨기에 브뤼셀 & 겐트 여행의 네 가지 장면

브뤼셀과 겐트를 여행하며 엿본 지속 가능한 벨지안 라이프.

브뤼셀 중앙역 산책
최근 ‘지속 가능한 여행’을 위해 기차에 오르는 이들이 늘고 있다. 2시간 30분 내로 이동할 수 있는 열차편이 있는 경우 항공 이용을 금지한 프랑스와 2050 기후 행동 계획의 일환으로 유사 정책을 검토 중인 스페인 등 철도 여행에 대한 유럽 내 인식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다.
벨기에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먼저 철도가 건설된 나라다. 1835년 브뤼셀을 시작으로, 1840년 오스텐데(Oostende), 겐트(Gent), 브뤼헤(Brugge), 안트베르펜(Antwerpen)까지 확장돼 1843년 벨기에를 동서와 남북으로 잇는 노선이 완공되었다. 오늘날 3,607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로는 벨기에 전역을 촘촘하게 잇는다. 초여름, 파리 북역에서 벨기에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파노라마로 스치는 푸른 지평선을 두 시간 남짓 눈에 담다 보면 브뤼셀 중앙역에 다다른다.
 
벨기에 국영 철도는 정액제다. 출발역과 종착역이 적힌 티켓을 발권해 2~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열차를 하루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여행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호사다. 중앙역 내부를 찬찬히 둘러본다. 시간을 축소하고 공간을 확장시키며 여행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역사의 현장. 웅장한 아케이드 아래로 쏟아지는 투명한 빛이 마치 여행자를 위한 찬란한 등불처럼 느껴진다. 겐트 출신이자 아르누보 창시자로 불리는 빅터 오르타(Victor Horta)의 역작이다. 벽면 곳곳에 칠해진 탱탱(Tintin) 그라피티가 만화의 발상지에 당도했음을 실감케 한다.
내친김에 역을 벗어나 길 위로 나선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딛고 나직한 언덕에 오르니 브뤼셀 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진다. ‘예술의 산(Knustbert)’이라 불리는 브뤼셀의 명소다. 도심에는 유서 깊은 플랑드르의 문화유산과 세련된 아르누보 건물이 가득하다. 빅토르 위고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칭송한 그랑 팔레(Grand Palais)도 지척이다. 겨우 반나절 늑장을 부렸을 따름인데 보물찾기의 우승자가 된 기분이다. 이대로 기차에 오르면 북부의 베네치아라는 브뤼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 있다는 안트베르펜, 도버 해협을 맞댄 블랑켄베르허(Blankenberge)까지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겐트의 자전거 라이프
브뤼셀에서 기차로 30분을 달리면 겐트에 이른다. 벨기에 북서부의 작은 도시가 얼마나 자전거 친화적인지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도시와 첫인사를 나누기 위해 광장으로 나가니 사방이 온통 자전거다. 택배 기사, 음식 배달원, 하이힐과 구두를 신은 직장인, 걸음마를 막 뗀 어린아이, 경찰 등 모두 자전거를 타고 있다. 트램 선로와 자동차 도로를 능숙하게 누비며 쉼 없이 달린다. 그 저변엔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자전거 도로망이 있다. 겐트시는 2017년 자동차 통행 제한 구역을 설정하고 자전거와 보행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했다. 도심에는 자전거 전용 도로와 교차로를 설치해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과 편의를 보장한다.
겐트에 머무는 동안 도시의 암묵적 규칙을 따라 매일같이 자전거에 오른다. 트램 선로를 통과할 땐 벌어진 철로 사이로 바퀴가 빠지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동차와 자전거 도로의 교차점을 지날 땐 왠지 모를 해방감에 사로잡힌다. 자전거의 권리가 자동차보다 앞서다니!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만나면 통통 튀어 오르는 느낌을 즐기고, 마침내 자전거 전용 도로에 들어서면 맞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속도감을 만끽한다. 도심 하늘 위로 우뚝 솟은 세 개의 첨탑, 니콜라스 성당(Sint- Niklaaskerk), 바보 성당(Sint-Baafs), 제이콥스 성당(Sint-Jacobskerk)이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겐트에서 자전거란 어디로든 데려다주는 마법 신발과 같은 존재다.
 
길드에서 도시 커먼즈로
도시 커먼즈(Urban Commons)는 일종의 사회 실험이다. 도시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민은 연대를 형성해 자발적으로 도시를 가꾼다. 도시 커먼즈의 모델로 가장 먼저 손에 꼽는 곳이 바로 겐트다. 중세부터 발돋움한 길드 체제의 연대 경제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정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는 것. 겐트에는 500개가 넘는 도시 커먼즈가 존재한다. 커뮤니티, 환경, 에너지, 주거, 식량,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커먼즈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인권과 윤리를 앞세우며 공동체에 대한 열린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순환 경제의 지속성을 추구한다. 재생 에너지 협동조합을 설립해 주택 지붕의 태양열 패널을 관리하고, 도심 내 돼지 농장과 연계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한다. 공정하게 생산된 지역 유기농 식품의 유통을 장려하며 도시와 농촌을 잇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좁힌다. 공동체 토지 신탁을 운영해 저소득층 주거 문제에 앞장서는가 하면, 교회나 항만 등 낡고 오래된 시설을 공동 실험장으로 탈바꿈시킨다.
 
겐트에 머무르는 동안 수돗물을 마셔야 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보지 못했고 빨래통이 넘쳐야 겨우 세탁기를 돌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방인을 기꺼이 환대했고, 동성 커플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한번은 허브 워크숍에 참여하게 됐는데, 플랑드르의 들녘을 걸으며 자생하는 들풀의 효용성을 살폈다. 공동체를 위해 약간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일상이 모여 도시에 새 물결이 일고, 그 물결이 도시를 되살리고 있는 곳. ‘지속 가능성’은 겐트의 정체성 그 자체다.
 
플랑드르의 들녘에서
겐트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데인제(Deinze)의 오이동크 성(Kasteel Ooidonk)은 중세 유럽의 영토 분쟁, 민중 봉기, 종교전쟁 등 플랑드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성이다. 현재 백작 가문의 소유로 내부 출입이 제한되어 있지만, 성 주변으로 조성된 산책로는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7.7킬로미터 길이의 오이동크 둘레길은 플랑드르주의 지속 가능한 녹지 재생 사업 덕분에 이스트 플랑드르(East Flanders)의 새로운 명소로 거듭나는 중이다.
7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블루 게이트를 출발점 삼아 발걸음을 내디딘다. 양옆으로 오래된 라임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휴일의 거리는 형형색색의 빈티지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는 카퍼레이드로 떠들썩하다. 사시나무 군락을 경계로 들풀이 우거진 대지에는 소와 양, 말이 거닌다. 반짝이는 강줄기를 따라 쉴 새 없이 지나가는 보트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니 어느새 교각에 닿는다. 1861년 건설된 기념비적인 수문, 레이어강의 도개교(Astene Sas)다. 작은 박물관이 딸린 19세기 양식의 카페테리아(Sashui)에서 수도승이 빚었다는 맥주와 돼지 간을 으깬 파테로 허기를 달랜다.
내친김에 둘레길을 벗어나 발길 닿는 대로 향한다. 여름의 초입을 수놓은 찔레꽃과 야생 장미, 엘더플라워의 흐드러진 꽃잎이 강물을 타고 웅덩이로 모여든다. 수영과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보셀라레 풋(Vosselare Put)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다. 여름이 시작되면 고요한 웅덩이는 들썩들썩 춤을 출 것이다. 둘레길에서 너무 멀어지기 전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수동으로 작동하는 바티오(Bathio)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는 동안 누구나 뱃사공이 된다.
한배에서 내린 플랑드르 사람들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시야에서 멀어지고 호기롭게 길을 벗어난 이방인은 무작정 걷는다. 끝없이 펼쳐진 감자밭 어딘가. 새하얀 감자꽃은 성운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플랑드르 회화 속 목가적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수도 없이 화폭에 담겼을 포플러나무가 햇살과 바람이 지나간 방향을 가리킨다. 플랑드르의 들녘 같은 여백이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드리운다. 둘레길을 비켜선 짧은 모험은 GPS로 표시된 점과 선보다 더욱 선명한 마음의 지도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