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용 건축가의 무주 공공건축

Where Daily Life Meets Nature
자연과 공존하는 무주의 일상 속 건축

자연과 공존하는 일상 속 건축 목욕탕이 있는 면사무소, 흙으로 지은 마을회관, 갤러리 같은 납골당. ‘감응의 건축가’ 정기용이 남긴 공공 건축물을 찾아가는 무주 여행.

우리나라 공공건축의 대표 건축가로, ‘건축계의 공익요원’ 또는 ‘공간의 시인’으로 불리는 고(故) 정기용 건축가는 1996년부터 10여 년간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무주에 30여 개의 공공건축물을 남겼다. 무주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당시 무주군 인구는 3만 1,000명. 이 프로젝트는 산촌 무주에서 일어난 전무후무한 일대 사건이었다. 건축가는 무주에서의 10여 년에 대해 “행운이면서 동시에 고난의 행군이었다.”고 자신의 저서 〈감응의 건축〉에서 소회를 밝혔다. 건축가는 떠났지만, 무주에는 그의 혼이 담긴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무주의 공공건축은 다른 지역에 비해 한발 앞서갔다. 민선 자치 첫해부터 군청 담장을 허물고 주변 환경을 열린 공간으로 바꾸었다. 무주읍사무소를 비롯한 안성·무풍·적상·부남·설천면 등 무주군 6개 읍·면사무소는 주민이 주인이 되는 주민 중심 생활공간으로 변모했다. 이외에도 군청, 반딧불시장, 곤충박물관, 천문대가 있는 면사무소, 의료원, 복지관, 청소년수련관, 납골당, 서창향토박물관, 버스정류장 등 공공건축물을 생태도시의 개념에 맞게 리노베이션하거나 새로 지었다.
무주 공공건축프로젝트의 시작은 정기용 건축가가 안성면 진도리 주민들과 함께 흙건축 마을회관을 지으면서부터다. 콘크리트 일색으로 변해가는 농촌 마을에 자연 친화적인 건축공법으로 주민들의 공간을 만들면서 사람과 자연과 시간이라는 요소가 함께 공존할 수 있게 했다. 현재 진도리 마을회관 1층에는 마을회관, 2층에는 지역아동센터와 작은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안성면사무소(당시는 주민자치센터, 현재는 행정복지센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이 있는 면사무소다. 건축에 앞서 건축가는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사무 공간 이외에 주민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을 계획한다. 건축가는 “면사무소는 뭐 하러 또 짓는가? 목욕탕이나 지어주지.”라는 주민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당시 안성면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업시설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지만, 대중목욕탕이 없었다. 주민들의 요구를 들은 건축가는 안성면사무소에 대중목욕탕 시설을 함께 지었다. 그 후 무주군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면사무소에 목욕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1층과 2층을 아우르는 여러 개의 창을 통해 덕유산의 파노라마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고, 정면에는 중앙 현관으로 향하는 반원형 회랑을 만들어 그늘과 소통의 길을 내었다. 현재는 머루 넝쿨을 올려 봄부터 가을까지 머루 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을 볼 수 있다. 건축가는 이 공간의 주인이자 사용자인 주민들에게 의견을 묻고 설계에 반영했다. 그가 사람과 땅의 의견을 듣는 ‘감응의 건축가’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주에 남겨진 공공건축물 중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은 단연 등나무운동장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연출한 건축가의 대표 작품으로, 30여 년이 지난 현재도 지역 주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간이다. 등나무 운동장은 등꽃이 피는 5월에 가장 빛이 난다. 연둣빛 새순과 함께 보랏빛 등꽃이 운동장 전체를 물들이며 장관을 이룬다. 건축가는 〈감응의 건축〉에서 “서울에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이 있고 무주에는 등나무운동장이 있다.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등나무운동장이.”라는 글을 남겨 이 장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2012년 고인의 삶과 철학, 그의 마지막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 (각본/감독 정재은)가 개봉되었다. 이후 우리나라 공공건축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에는 건축학도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공공건축물을 답사하기 위해 무주를 찾곤 한다.

무주의 주요 공공건축물

무주군청 리노베이션
옛 군청 건물은 그대로 둔 채 3층 건물을 증축하고 뒷마당을 리노베이션 했다. 외부 담장을 없애고 주차장은 지하로 옮기면서 뒷마당은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개방하고,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회랑을 만들어 비 오는 날에도 직원과 방문객이 손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무주 추모의집
죽음을 기리는 동시에 살아 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공간에 초점을 맞춘 납골당. 원래 이 일대에 있던 인삼밭의 검은 차양에서 영감을 얻은 건물과 지붕의 형태가 특징이다. 자연채광을 활용한 내부는 밝고 탁 트인 느낌을 주며, 중정을 설계해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무주군 보건의료원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6층짜리 건물을 매입해 의료원으로 리모델링했다. 정기용 건축가가 가장 신경 쓴 공간은 장례식장과 연결되는 병원 후문. 망자가 장례식장을 나서면서 무주와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대합실을 만들고 마을 풍경이 한눈에 담기는 커다란 창을 냈다. 아쉽게도 현재는 유리블록으로 창을 막아 건축가의 의도를 확인하기 어렵다.
 
평화요양원
2006년 문을 연 노인전문요양시설로, 요양원 특유의 차갑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외관은 붉은 벽돌로 주택의 느낌을 살리고 독립된 여러 채의 건물이 하나의 마을처럼 옹기 종기 모여 있는 듯한 모습을 표현했다. 실내는 널찍한 복도와 높은 층고로 개방감을 주었다.
 
등나무운동장
주민들이 앉는 공설운동장 스탠드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무주 군수가 심은 240그루의 등나무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정기용 건축가는 이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등나무 덩굴을 지지할 철제 구조물을 설계했다. 단순하면서도 등나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형태가 인상적이다.
 
평촌마을 버스정류장
두께 25센티미터의 콘크리트로 벽을 세우고 목재 지붕을 얹어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건축물을 의도했다. 의자를 ‘ㄱ’자로 만들어 기다리는 사람들끼리 시선이 교차하도록 하고, 벽면의 커다란 창을 통해 주변의 자연과 마을 풍경을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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