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예술공간

Art & Design Spaces in Singapore
전진하는 싱가포르 예술 공간

싱가포르의 예술 공간은 시대의 변화를 과감하게 포착한다. 법원을 현대미술관으로, 물류 창고를 실험적인 갤러리로, 군사 시설을 예술 지구로, 학교를 복합 문화 공간으로 뒤바꾸는 절묘한 선택은 싱가포르의 미적 지형도를 새롭게 그려내고 있다.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
Singapore Art Museum at Tanjong Pagar Distripark

싱가포르 현대미술은 1996년 설립된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이하 SAM)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라스 바사(Bras Basah)의 유서 깊은 건축물 세인트 조셉 학교(St. Joseph’s Institution)에 본관을 설립한 이후 퀸 스트리트(Queen Street)에 문을 연 별관 SAM at 8Q와 2022년 선보인 탄종 파가 디스트리파크에 이르기까지, 도시 곳곳의 여러 장소를 오가며 동시대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 작가들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왔으니 말이다. 오늘날 SAM은 8회째를 맞은 싱가포르 비엔날레를 비롯해 아트 위크, 아트 북페어 등 주요 이벤트를 개최하며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알리는 한편, 도시의 미술 담론을 실험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2019년 도시 재개발의 일환으로 브라스 바사의 본관과 SAM at 8Q 별관이 문을 닫으면서, SAM의 거점은 자연스럽게 탄종 파가 디스트리파크로 옮겨 갔다. 컨테이너 화물 트럭이 분주하게 오가는 항만 물류 창고 건물 안에 미술관을 옮겨 놓은 것만으로도 SAM의 지향점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처음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기존 미술관의 절제된 전시 공간과 완전히 다른 탄종 파가 디스트리파크의 구조는 SAM만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드러낸다. 내부 전시관의 층고가 높은 덕분에 대형 설치 작품과 퍼포먼스, 사운드 작업을 자유로이 시도할 수 있고, 외부의 화물 적재장마저 기꺼이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신진 작가들은 이곳에서 식민 시대의 기억, 환경 문제 등 자유로운 주제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며 관객들에게 남다른 몰입감을 선사한다. 1시간 동안 진행하는 도슨트 투어 시간에 방문하면 SAM에서 진행 중인 현대미술 전시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National Gallery Singapore

매년 초 싱가포르 아트 위크와 연계해 열리는 ‘라이트 투 나이트’ 페스티벌 기간이면 싱가포르의 주요 건축 유산은 컬러풀한 미디어 파사드로 뒤덮인다. 축제의 주인공을 꼽는다면 다름 아닌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 잔디밭이 드넓게 깔린 1파당 광장을 마주하고 푸른 돔을 얹은 좌측 건물과 육중한 기둥이 도열한 우측 건물이 한몸처럼 이어진 미술관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두 건물은 각각 대법원과 시청으로 사용되며 독립 이후 국가의 핵심 권력이 작동하던 주요 무대였다.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장 프랑수아 밀로(Jean-François Milou)는 두 동의 옛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조화롭게 연결하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2015년 개관한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현대미술 공공 컬렉션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서구 미술사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 지역이 어떻게 식민지 시기를 통과했고, 또 현지 작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미적 언어를 완성했는지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다. 두 동의 건물을 연결한 중앙 로비 공간 또한 인상적이다. 나무처럼 생긴 기둥이 지탱하는 넓은 유리 지붕은 자연채광을 실내로 끌어들이고, 실험적인 설치 작품이 공간을 한층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도심과 마리나 베이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옛 대법원 건물 루프톱의 전망 덱도 볼거리다. 

길먼 배럭스
Gillman Barracks

싱가포르 도심에서 벗어나 남서쪽으로 향하면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신록이 우거진 공원 지대가 펼쳐진다. 텔록 블랑가 힐 파크(Telok Blangah Hill Park)는 2서던 리지스(Southern Ridges)로 연결된 일대의 5개 공원 중 하나다. 철제 공중 보행로 포레스트 워크(Forest Walk)를 따라 공원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군의 병영 기지로 사용하던 막사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3영국군 장교의 이름을 딴 길먼 배럭스다. 독립 이후에도 싱가포르 군대의 주요 훈련지로 쓰이던 이곳은 2012년 싱가포르 정부의 지휘 아래 예술 지구로 변모했다.
길먼 배럭스는 프로젝트 초기 단계부터 지속 가능한 예술 단지를 지향해왔다. 녹지 사이에 낮게 흩어져 있는 병영동에는 국내외 다양한 갤러리가 입주해 아이웨이웨이(Ai Wei Wei),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세바스티앙 살가두(Sebastião Salgado) 등 세계적 거장은 물론, 현지 신진 예술가들의 전시를 두루 소개한다. 덕분에 이곳을 찾은 여행자는 산책하듯 갤러리 호핑 투어를 즐길 수 있다. 옛 병영동 안에는 갤러리뿐 아니라 해산물 요리로 정평난 레스토랑 네이키드 핀(The Naked Fin)과 브루잉 카페, 바이크 편집숍 같은 특색 있는 상점이 입점해 있으니 시간을 넉넉히 잡고 여유롭게 돌아볼 것을 추천한다.

프라이빗 뮤지엄
The Private Museum

싱가포르 중심가의 부기스, 브라스 바사(Bras Basah.Bugis)는 앞 글자를 따서 ‘BBB’로 불린다. 미술관과 예술 학교, 서점, 공연장이 밀집해 있는 이 지역은 오랜 시간 싱가포르 문화 예술 인프라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최근에는 브라스 바사의 19세기 저택 오스본 하우스(Osborne House)에 들어선 프라이빗 뮤지엄이 싱가포르 미술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사업가 다니엘 터(Daniel Teo)가 개인 컬렉션을 기반으로 설립했는데, 비영리 미술관을 지향하며 국공립 미술관과 상업 갤러리만 존재하는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는 중이다.
프라이빗 뮤지엄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아시아 동시대 미술. 그중에서도 정체성과 기억, 이주민, 사회 불평등 같은 비주류 문화다. 이곳에서 비정기적으로 기획하는 전시의 면면을 살펴보면 거대한 스케일이나 기교 대신, 작가의 메시지와 작품의 서사적 배경을 텍스트로 옮겨내는 데 정성을 기울이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 사람 평균 키높이보다 낮은 문간 등 100년이 훌쩍 지난 옛 저택 내부를 둘러보는 것 자체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뮤지엄은 기획 전시에 맞춰 개방하고 세부 일정은 웹사이트에서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STPI 크리에이티브 워크숍 앤드 갤러리
STPI Creative Workshop and Gallery

로버트슨 키(Robertson Quay)는 싱가포르 강을 따라 형성된 오래된 강변 상업 지구다. 도시 건설 초창기에 보트 키(Boat Quay), 클락 키(Clarke Quay)와 함께 싱가포르의 무역을 떠받치며 창고와 물류 시설이 밀집한 지역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세련된 레스토랑과 바, 호텔이 모여 있는 고급 주거 단지로 변모했다.
강변 창고 건물을 개조해 문을 연 STPI 크리에이티브 워크숍 앤드 갤러리 역시 이런 변화의 흐름을 확인시켜주는 공간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STPI(Singapore Tyler Print Institute)는 2002년 싱가포르 정부의 지원 아래 설립된 비영리 현대미술 기관인데, 20세기 후반 ‘마스터 프린터(Master Printer)’로 불린 4케네스 타일러(Kenneth E. Tyler)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다. 갤러리는 이름처럼 종이 매체와 판화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제작 중심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주축이 되어 전문 공방과 전시 공간을 겸한다. 세계 각국의 작가들이 이곳에 머물며 숙련된 기술자와 협업하며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그 결과물은 세계 유수의 아트 페어와 미술관에 소개된다. 한국의 이불 작가와 서도호 작가 역시 이곳에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연계된 신작 전시 관람 후엔 뛰어난 완성도의 도록과 인쇄물을 접할 수 있는 갤러리 숍에 들러보자.

뉴 바루
New Bahru

그간 싱가포르의 트렌드가 궁금한 이들은 대형 쇼핑몰이 모여 있는 오차드 로드(Orchard Road)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리버 밸리의 뉴 바루에도 가야 한다. 옛 고등학교 캠퍼스를 리뉴얼해 2024년 문을 연 라이프스타일 복합 공간으로, 패션, F&B, 웰니스, 스테이, 아트 스튜디오 등 현재 싱가포르에서 가장 주목받는 40여 로컬 브랜드가 두루 입점해 있다.
그렇다고 뉴 바루를 단순히 떠오르는 최신 쇼핑몰로 여기면 곤란하다. 옛 강당 공간에서 전시와 공연, 문화 이벤트를 개최하고 운동장을 개조한 놀이터와 마당 곳곳에선 팝업 행사를 열며 싱가포르의 새로운 창작 단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지난 싱가포르 아트 위크 때는 학교 건물 외벽을 활용해 대형 사진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부지 구석구석을 누비며 다채로운 영감을 얻고 교실 자리마다 입점해 있는 브랜드를 탐험하는 것이 뉴 바루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 싱가포르 스페셜티 커피계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5PPP 커피에서 페이스트리와 향긋한 필터 커피를 맛보거나 캐주얼한 페라나칸 요리를 선보이는 6코코넛 클럽 리버 밸리에서 락사 혹은 나시 레막을 주문해보자. 덤플링 백으로 유명한 로컬 브랜드 7비욘드 더 바인스 디자인 하우스에서 컬러풀한 패션 소품을 구경해도 좋다.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Red Dot Design Museum

1954년 독일 에센(Essen)에서 시작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Design Award)는 명실상부 최고 권위의 디자인 공모전으로 꼽힌다. 제품 디자인, 브랜드 &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콘셉트,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선정된 수상작은 싱가포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에센에 이은 레드닷의 두 번째 디자인 뮤지엄이 2005년 아시아 최초로 싱가포르에 문을 열었기 때문. 싱가포르의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은 당초 맥스웰 로드(Maxwell Road)의 옛 교통경찰 본부에 들어섰다가 2017년 마리나 베이 워터프런트로 자리를 옮겼다. 동시대 디자인 트렌드를 확인하기 위한 장소로 마리나 베이 지구는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뮤지엄에서는 세계 각국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을 분야별로 전시한다. 각 수상작의 선정 이유 또한 상세하게 안내돼 있어 관람의 재미가 배가되며, 테크와 모빌리티, 일상용품 등 제품 디자인의 변천사와 트렌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사실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을 찾은 방문객 상당수의 최종 목적지는 건물 1층에 자리한 디자인 숍이다. 레드닷 어워드 수상작은 물론, 레드닷이 공인한 디자인 제품을 구입할 수 있어 디자인 전문가와 일반 애호가 모두에게 인기 있는 장소. 이색 기념품을 손에 넣은 뒤에는 디자인 가구로 꾸민 카페에서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마리나 베이의 전망을 즐길 수 있다.

ArtScience Museum
아트사이언스 뮤지엄

마리나 베이의 워터프런트를 따라 걷다 보면, 연꽃처럼 펼쳐진 새하얀 건축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2011년 개관한 아트사이언스 뮤지엄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이스라엘 출신의 건축가 모셰 사프디(Moshe Safdie)의 말에 따르면 ‘열린 손’을 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상징하는 절묘한 형상처럼 느껴진다. 꽃잎처럼 갈라진 10개의 구조 상단에는 채광창이 설치돼 자연광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중앙에는 빗물을 모아 실내 폭포로 흘려보낸 뒤 재활용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의 열대 기후에 대응하는 친환경 설계이자, 도시 속 지속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기능과 메시지가 결합된 건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시처럼 작동한다.
뮤지엄 내부로 들어서면 이름 그대로 예술과 과학, 기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색 전시가 기다린다. 인공지능, 생명과학, 우주 탐사 등 다양한 주제를 바탕으로, 대규모 디지털 프로젝션과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을 적극 도입하며 관람객에게 몰입형 관람 경험을 선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일본 아트 컬렉티브 팀랩(teamLab)과 협업해 선보이는 퓨처 월드(Future World)는 아트사이언스 뮤지엄을 대표하는 상설 전시로,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빛과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디지털 아트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