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남용

Yurimmm Yurimmm Yurimmm Interviewing-Writing
유림 유림 김유림, 인터뷰-쓰기

지금 여기의 별세계에 있었던 시인, 1 김유림과의 인터뷰

인터뷰어 허태우
인터뷰이 김유림
사진 최남용
1 2016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세 권의 시집을 냈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글을 쓰고 발표한다.


보통 인터뷰를 하면, 사전에 질문지를 보내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안 보냈습니다.
왜죠?

재미있게 하려고요.
아, 재미있게 하려고. (웃음) 네, 좋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2 〈별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홍승택 씨는 누구인가요?
제 친구이자 동료예요. 제가 글 쓸 때 초창기부터 같이 해온 친구인데, 시도 쓰고요. 요즘에는 경계를 넘나들면서 퍼포먼스를 주로 하고 있어요. 〈토이박스〉라는 문예지에 저희가 같이 투고를 했어요. 공동 작업 투고를 받는 난이 있어서 “승택, 우리 이거 해볼래?”하고 제가 제안을 했죠. 당시 주제가 ‘편지’였고요. 이 친구가 건축학과를 나왔거든요. “우리 둘 다 시를 쓰는데 내가 시를 써서 보내주면 네가 시랑 도면 같은 걸 떠오르는 대로 그려서 보내줄래? 그럼 내가 그에 대한 응답으로 또 시를 쓸게.” 이렇게 돼서 시와 도면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세 번 정도 오갔고, 그걸 이번 시집에 실은 거예요.

시집 세 권이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드문 케이스 아닌가요?
조금 드문 것 같긴 하지만 또 아예 그런 경우가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좀 특이하게 보이나요?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이렇게 보이는 건가. (웃음)

메이저 출판사 세 곳에서 시집을 하나씩 출간했으니 요즘 시의 스타일에 맞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방향〉이나 5 〈세 개 이상의 모형〉은 제가 투고해서 출간된 시집이에요. 보통 작가가 먼저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 출간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최근에 발표한 6 소설도 그렇고, 어느 정도 시가 모이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렇게 엮어서 내면 좋겠다 싶을 때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특정 출판사에 투고를 해요.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이 나왔고요. 그렇게 보더라도 어쨌든 제 투고를 각 출판사에서 받아준 것이니까 좀 신기하긴 하죠.

투고해서 출간되는 게 더 어렵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죠. 사실 처음에는 힘들었죠. 초기에 등단을 하고 몇 편 발표를 하면 바로 연락을 받는 작가도 있는데, 제 경우는 그렇지 않았어요. 해외 출판사에선 보통 책 단위로 투고를 받는다고 알고 있거든요. 등단 절차 같은 것도 국내와는 조금 다르고. 그래서 뭐, 이렇게도 한다는데 한 번 해보지 라는 생각으로 시도하게 됐죠. 저의 마음 속 힘듦도 타개할 겸. 그리고 제가 시를 쓰는 스타일이 한 편 한 편으로 임팩트를 준다거나, 보통 시에서 기대하는 강렬한 한 구절이 있는 타입이 아니거든요. 한 권의 흐름으로 뭔가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으니 책으로 보여주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평소에 작업량이 많겠어요.
네, 맞아요. 죽겠습니다. (웃음) 제 스스로 주는 마감이 있는 거죠. 시에 한정하지 않고, 프로젝트 소설을 쓰고, 번역 작업도 조금씩 하고 있어요. 번역가에 따라 텍스트가 달라지는 것에 대해 논의를 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번역 연습’ 이라는 시리즈를 발표해보려고요. 작년에 김희천 작가님의 ‘사랑과 영혼’이라는 VR작품을 보고 너무 좋아서 비평도 쓰고 있었어요. 그러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중단이 되긴 했죠. 이번에 시집을 냈고 시 마감이 있으면 하고 그 다음에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현재는. 많긴 하죠.

이것저것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하네요.
네, 다작을 하는 편이고 많이 쓰는 만큼 많이 버리기도 하고 퇴고도 여러 번 거쳐요. 그런 작업 전반을 즐기는 편입니다.
 

2 김유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2022년, 창비에서 발행.

3 올라운드 문예지를 표방 하는 〈토이박스〉는 현재 7호까지 발행됐다.

4 김유림 시인의 첫 시집으로, 민음사에서 2019년에 발행했다.

5 김유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2020년에 발행했다.

6 <문학과 사회> 2022년 봄호에 소설 '갱들의 어머니'를 발표했다.


작업하고 연관된 직장 생활을 하는 건가요?

사실 다닌 지 얼마 안 됐고요, 글을 쓰는 업무이기는 한데 일하는 곳 자체는 되게 동떨어진 분야입니다. 제조업 분야의 스타트업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라 다르죠. 글을 쓴다는 점에서는 같고요. 머리가 말 그대로 반으로 쪼개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 권의 시집 〈양방향〉 〈세 개 이상의 모형〉 〈별세계〉가 1년에 한 번씩 나온 셈이지요?
거의 그렇죠. 〈양방향〉과 〈세 개 이상 모형〉은 반 년 정도 차이로 나왔고, 작년을 건너 뛰고 〈별세계〉가 올해 나왔죠.

〈양방향〉은 김유림 시인 개인을 자기라고 생각해서 썼다면, 〈세 개 이상의 모형〉은 개인일 수도 있고 타자일 수도 있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쓴 것 같고, 〈별세계〉는 완전히 그냥 ‘유림’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 같아요. 여행으로 얘기한다면, 누군가 여행을 가면 모두 다 외국인이지만 타자이고 나 자신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여행지에 있는 유림이 쓰는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시집을 독자로서 보면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으로는 자아가 커지면 이렇게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모든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거고 결국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글쓰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자신을 얼마나 드러내느냐의 문제지. 평론 같은 경우도 결국은 다른 사람을 통과해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라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자아가 커지고 있다고 보는 게 어떤 의미에선 맞을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이나 김유림이나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이나 아니면 문장이 뻗어 나가는 방식이 좀 다르죠. 예를 들어 ‘김유림의 비기’라는 시를 보면 나나 김유림의 관계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죠. 그래서 자아가 커진 것 같다는 말이 뭘까, 더 듣고 싶네요.

커졌다기보다 쪼개졌다, 갈라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양방향〉은 어떤 의미에서 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썼다면 확실히 이번 시집은 일차원적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고요. 개인적 으로는 첫 시집, 둘째 시집에 비해서 좀 더 잘 쓴 것 같아요. (웃음)


유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셨다고요.

원래 한글 이름 이어서 한자가 없었는데 제가 한자를 넣었어요.그것도 개명으로 치더라고요.

한 시집에 같은 제목을 가진 다른 시들이 있잖아요. 이런 작업은 김유림의 다른 김유림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담긴 건가요?
사실 이 시집에 ‘별세계’라는 시가 없어요. 표제작이 없는 거죠. 별세계라는 단어는 “너는 별세계에서 왔니? 왜 이런 것도 몰라?”라는 식으로 문명에 뒤떨어진 사람을 말할 때 아니면 새로운 여행지에서 “여기는 진짜 별세계다”는 식으로 어딘가 좀 다르고 좋다는 의미로 사용하잖아요. 이 시집은 표제작이 없을 뿐더러 시인의 말에 쓴 것처럼 ‘사실 나도 별세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 지금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라는 게 대체 뭘까?’라는 질문을 위해 한 권이 쓰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 안에 별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도 맞고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는 별세계라는 게 다른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뭔가 조금씩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이 있다고 볼 수도 있죠. 예를 들면 ‘인터뷰의 길’이라는 시가 있어요. 내용적으로 “그러나 그들은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는 말을 반복을 하고, 어떤 장면이나 일이 꿈인 듯 현실인 듯 겹쳐지고, 문장도 일부러 겹치게 했어요. 마치 받아서 이어쓰기를 하거나 아니면 이미 있는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서 다시 쓰기를 한 것처럼. ‘그 카페로 다시’처럼 서로 크게 연관이 없는데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면 같은 제목을 가진 시는 하나를 먼저 쓰고 다른 걸 쓰는 건가요. 아니면 동시에 두 편을 동시에 쓰나요?
보통은 이어서 썼던 것 같아요. 원래 한 편인 시를 이후에 두 편, 세 편으로 만든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는 시간을 두고 작업한 거고요. 같은 제목을 두고 내가 써낼 수 있는 시를 동시에 쓰기도 했죠. 음, 인터뷰 질문지를 왜 미리 받는지 알겠네요. (웃음) 편집자랑 나눈 얘기인데, “별세계가 여기” 라는 것에 저는 동감합니다. “저 사람은 별세계에서 왔나봐. 저런 것도 모르다니.”라고 말할 때 ‘저 사람’은 분명히 ‘여기’에 속한 사람이잖아요. ‘저 사람’을 내가 가리킬 수 있다는 건 저 사람이 ‘여기’ 있기 때문이고. ‘여기’를 벗어난 저기가 있다는 상상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반면 평행세계에 대한 상상은 많이 하죠. 만약에 제가 크게 사고를 당할 뻔 했으면 다른 평행세계에서는 제가 죽었거나 크게 다쳤다고 상상하는 거죠. 비관적인 게 아니라 무수히 갈라질 수 있는 순간순간이 있었고, ‘여기’라는 것은 계속해서 달라진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받아쓰기를 하듯이 이미 쓴 시를 이어받아서 문장에 변형이나 변주를 주는 방식으로 쓰게 된 것도 어느 정도 제가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생각 혹은 태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일 수도 있지만 텍스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얼마 전에 ‘북북서로’라고 창비 팟캐스트에서 제 책을 다뤘는데 그 때 김현 시인이 제 시에 대해 “우리가 흔히들 시라고 생각하는 것에 도달하기 직전에 멈추는데 그것들이 시가 되고 있다.”라고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그 표현이 제 시집을 읽을 때 이해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제 시가 텍스트일 수도 있겠다, 라는 것도 재미있고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시집이라는 말을 꼬리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장르를 구분 짓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로 쓴 게 맞고요. 시집으로 내놓고 시집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읽었을 때 시가 되는 거죠. 만약에 “장르와 무관하게 그냥 읽어도 돼.”라고 내놨으면 아무도 입구를 찾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제한이 있기 때문에 이게 오히려 더 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 하거든요. 영화가 아닌, 시가 아닌, 소설이 아닌, 무언가 다른 걸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시다, 라는 얘기를 들으면 저는 행복하죠. 그런 것까지도 의도를 했다기보다는 바랐으니까. 충분히 그렇게도 가능하죠.

7 踰琳.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여행을 갈 때 여행지는 어떻게 고르나요?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주로 국내 여행을 했는데 여행지를 선택 하는 기준이 딱히 있지는 않고요. 그냥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도시로 가는 편이에요. 개인적으로 조금 심심할 것 같은 여행지를 좋아합니다. 약간 황량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거기 가면 별 거 없어.”라고 말하는 데 있잖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가고 싶어요. 유명한 장소를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동네의 길을 걷고 시장도 다니고. 밥집도 지나가다가 간판이 마음에 들고 오래된 곳 같으면 들어가서 먹어보죠. 최소 4박을 하면서 머문 동네를 어느 정도 익히고 떠난다는 생각으로 여행을 많이 해요. 예전에 부산을 방문했을 때는 민락동이나 구도심 주변에 머물렀고, 최근에는 수영동 일대에서 거의 지하철 2개 역 사이만 오가다가 왔죠. “내일도 거기서 떡을 사야지.” 하는 식으로 일상에서처럼 나만의 패턴을 만드는 거예요. 짧게라도 그곳에 사는 것처럼 하는 여행을 좋아해요.

예전에 저희 매거진에 8 걷기 시리즈 시를 실었는데, 원래 산책을 좋아하시는지.
네, 좋아해요. 눈이 안 좋은 편인데요. 안경을 쓰고 산책을 하는 것도 좋아하고 안경을 벗고 거의 안 보이는 채로 산책하는 것도 좋아해요. 좀 흐릿한 상태로 산책을 하면 오히려 눈치를 잘 채게 되는 시각적 요소들이 있거든요. 달라진 점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더라고요. 세밀하게 볼 수 있다는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안경을 쓰거나 벗고 같은 곳을 반복해서 산책 하는 걸 즐기는 편이에요. 혼자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고 같이 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사실 같이 산책하면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자꾸 내가 보는 걸 공유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잖아요. 아무래도 혼자 하는 산책과는 아예 다른 종류의 산책인 것 같아요. 이름을 달리 붙여줘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걷기 시리즈를 10편 정도 썼을 텐데,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장소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별세계〉와도 연관될 수 있는데, SF 분야에서 이계라고 표현하죠. 내가 갔던 그 장소와 내가 속해 있던 상황 전부가 이계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순간이라는 것은 지나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만질 수 있고 구체성을 갖고 있는 장소에 집착하는 거죠. 시간에 대해서는 어떤 촉각도 느낄 수 없지만, 장소라는 건 어쨌든 기본적으로 ‘존재했었다’는 환상을 심어주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의 장소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걷기 시리즈를 한창 쓸 때엔 장소에서 마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속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같아요. 내가 스페인에 있던 그 순간은 만질 수 없지만 장소는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고 앉아서 가우디 성당을 바라본 벤치도 있죠.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 확률이 높고요. 언어로 시간에 대해서 말하긴 좀 어렵지만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면 훨씬 연결되기 쉽죠. 단순하고 일차원적이지만 물질과 연관돼 있으니까. 안도감도 주고요.

여행을 떠날 때 꼭 갖고 다니는 소지품 같은 게 있나요.

원래 저는 보부상처럼 이것저것 다 챙겨가는 편이긴 해요. 꼭 챙기는 게 딱히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행을 가서도 시를 쓰나요?
그럴 리가요. 여행을 가면 여행에 집중하는 편이죠. 예전에는 여행을 가면서도 혹시 이 경험으로 나중에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는 그런 것조차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가는 게 여행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그것과 연관될 수도 있는데 제 시에 종암동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지금 현재 내가 머무는 일상 속에서 짚어낼 수 있는 구체적 장소에 대해서 집중해서 그런 것 같고요.
최근의 여행 같은 경우는 숙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주로 에어비앤비를 둘러보다가 내 집처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싶은 곳을 고르죠. 작든 크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 물건을 가져가서 제 화장대처럼, 제 작업대처럼 정리를 해놓거든요. 일단 여행지에 도착하면 짐을 풀어 집처럼 만들어 놓고 가벼운 몸으로 동네 주민인 것처럼 나가요. 여행이라는 게 예전과는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전에는 여행으로 뭔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 같은 게 있었어요. 동시에 그렇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서 여행을 정말 가고 싶은데 여행을 너무 가기 싫었어요. 뭘 해결하려고 떠나는 건 어떤 의미에서 짐을 들고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죠. 그냥 제일 가벼운 상태로 가요.

8 〈피치 바이 매거진〉 창간호에 실린 세 편의 시. ‘가시리 걷기’ ‘서울시립미술관 걷기’ ‘하남시장 걷기’.


지금까지 다녀온 곳 중 가장 기억나지 않는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무척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가장 기억나지 않는 여행지를 기억 속에서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을까요? 기억을 해낸다면 그건 가장 기억나지 않는 여행지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가장 기억나지 않은 여행지라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각각의 여행지는 머릿속에 숨어 있다가 결국 어느 순간엔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같은 촉매제를 만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죠.
오히려 강렬해서 꿈처럼 되어버린 여행지는 있어요. 독일 남부 지방 어디였는데 이름도 기억 못해요. 뱃삯을 내고 강을 건너 작은 독일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저를 보며 눈을 찢는 시늉도 했어요. 저는 그냥 웃었던 거 같아요. 작은 산을 올랐는데 새빨겠습니다. 아주 붉고 고요했고 저 혼자였어요. 다시는 그만치 붉게 타오르는 숲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원색적 꿈-여행지였죠.

지속 가능한 여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단 제가 살아 있어야 되겠네요. 그래야 지속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밸런스가 필요하겠죠. 여행도 하고 일도 하고 글도 쓰려면요. 여행과 일과 글과 글쎄요, 세계와 우주와 그리고 내 콩알만한 집과 맛있는 밥과 친구들 사이에서 제가 저로서 지켜 나가고 싶은 걸 지켜 나가야겠네요. 그래야 여행도 가능해질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눈앞에 있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짐이 되니까요. 정말 잘 떠나려면, 그러니까 정말 잘 여행하려면 일단 내가 나를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죠. 나를 나로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러니까 내 그릇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걸 인정하면, 어떤 여행을 언제 떠나도 괜찮을 것이고요, 여행의 직전과 여행의 도중과 여행의 이후가 다르면서도 같을 수 있겠죠.
‘지속 가능성’이란 단어가 유행하고 있습니다만. 이 단어가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어떤 중요한 화두(내가 인간이라는 걸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기)를 표현하는 한 방식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그냥 내가 인간이라는 걸, 다른 어떤 동물도 아닌 인간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가장 어렵고요. 이런 걸 받아들이면 여행이란 것도 인간으로서 지속해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글로 여행지를 창조할 수 있다면, 어떤 곳을 만들고 싶은가요?
와우. 창조요. 저는 제가 부자인 상태를 창조하고 싶어요. 그러면 여행지는 문제가 안 될 거 같아요. 이게 질문의 의도는 아니었겠죠? 글쎄요, 저는 그냥 평범한 거리가 있는 평범한 도시를 창조할 거 같아요. 계획 도시를 싫어해요. 이것저것 뒤죽박죽 섞여 있는 거리를 만들어낼 거고요, 약간 지저분해도 좋을 거 같네요. 어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나 자동차나 사람들을 만들어낼 거예요. 그래도 물은 있으면 좋겠어요. 평범한. 평범한 물. 그냥 그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요. 그래서 여느 때와 같은 햇살과 여느 때와 같은 소음을 들으면서 경쾌하게 걷고 싶은데요? 그걸 위해서 여행하는 거 같아서요. 특별한 곳은 이미 세상에 많이 존재하는 거 같아요, 실제로요. 그곳들은 실제로 가보면 될 일이죠. 제가 창조하는 여행지는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구별조차 되지 않는 거리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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