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에서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멀린 레이크는 마치 거대한 피오르를 연상시킨다. 좌우로 산줄기가 펼쳐진 22킬로미터 길이의 호수 위로 크루즈를 타고 떠다닐 때면 정말 그렇다. 이곳에서 바다까지 약 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멀린 레이크는 로키산맥의 여행 산업 태동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무시하지 못했던 재스퍼 출신의 프레드 브루스터(Fred Brewster)가 이미 1930년대 호수 북쪽에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여행객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 재스퍼는 철도 노선이 연결된 덕분에 캐나다 서부 개척과 로키산맥 여행의 중심지였다. 재스퍼에서 반나절간 말을 타고 터벅터벅 넘어온 여행객은 멀린 레이크의 비경과 함께 송어 낚시와 보트 타기를 즐겼다.
오늘날 호수 북쪽 끝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4 크루즈는 승객들을 스피릿 아일랜드(Spirit Island) 앞에 내려준다. 이 섬은 오직 배를 타고 접근할 수 있는데, 가이드와 홍보 자료의 설명에 따르면 로키산맥에서 가장 많이 사진에 찍히는 장소다. 크루즈에서 내리는 순간 그 이유를 알아차리게 된다. 에메랄드빛 호수 위에 떠 있는 아담한 섬과 그 뒤를 양옆으로 장식하는 깎아지른 산들. 거기에 길게 포말을 이끌고 나타나는 보트 한 대까지. 수백만 장의 여행 엽서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아무리 세심한 미술감독이라도 이렇게 연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1960년 코닥(Kodak)이 스피릿 아일랜드의 풍경을 광고 이미지로 사용하면서 섬의 존재는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대상이 아닌 섬처럼. 그 후에도 이 풍경은 필름 세대의 후손인 디지털카메라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2014년 애플의 아이패드 론칭 쇼케이스에서도 동일한 풍경이 등장한 것이다.
크루즈에서 내리면 섬의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딱 25분간 섬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이때부터 관광객들은 섬을 촬영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바쁘다. 온갖 촬영 장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좀 더 오른쪽으로” “손을 들어봐” “뒤로 돌면 어때?” 등을 외친다. 이렇게 스피릿 아일랜드는 또다시 수백 장의 사진에 자신을 알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