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찍은 왜가리.

 

© 이상엽

Seasonal Days
절기따라 떠나는 우리 땅 여행 2 - 입추에서 대한까지

기후 위기의 시대, 한반도의 계절은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 이상엽*이 모은 우리나라 24절기의 풍경, 그 두 번째** 이야기. 

글 ∙ 사진 이상엽
* <레닌이 있는 풍경> <파미르에서 원난까지> <변경지도> <은어는 안녕하신가?> 등의 책을 펴냈다.
** 24절기의 풍경 1편 - 입춘에서 대서까지의 풍경 보러 가기

입추 立秋 8월 8일
경기도 용인 처인구 백암면의 농촌 무논에서 벼가 입추의 따가운 볕에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지만 무척이나 오지처럼 느껴지는 농촌이다. 입추는 태양의 황도상 위치로 정한 24절기 중 열세 번째 절기다. 양력으로 8월 7일 내지 8일이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다. 이날부터 입동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지만 옛말이 됐다. 8월 초의 찜통 날씨로는 도저히 가을을 느낄 수 없다. 기상청이 100년간의 기후변화로 산출한 새로운 입추는 8월 20일이다. 게다가 요즘은 장마가 오락가락하면서 국지적으로 비를 꽤 뿌린다. 이 시기는 벼가 익는 때라 비가 많이 오면 농부들은 애가 탄다. 벼가 제대로 영글지 못할까 봐 그렇다. 

 
처서 處暑 8월 23일 
충북 영동의 동굴 와인 저장고다. 내부 온도가 한여름에도 섭씨 20도 미만으로 정온 장기 보존하는데 그만이다. 영도에만 와이너리가 40여 곳이 모여 있다. 입추 다음 절기인 처서는 원래 날짜 8월 23일보다 늦은 31일에야 나타난다. 이때쯤 돼야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가을이 온다는 것을 느낄 만하다. 햇빛도 누그러져 더 이상 풀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벌초를 해준다. 습도가 낮아져 밖에 옷이나 책도 말린다.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계절이기에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고 했다. 처서의 서늘함 때문에 파리, 모기의 극성도 사라져가고, 귀뚜라미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맘때면 과일도 출하되기 시작하는데, 그중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이 포도다. 원래 한로쯤 돼야 포도를 땄다고 했는데, 요즘은 영동 같은 대표적인 산지 기준으로 처서 때 수확을 한다. 외지인을 위한 포도 축제도 이쯤 열린다. 

 
백로 白露 9월 7일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이 무렵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한다. 대충 9월 중순, 새벽에 산책하면 바지 단이 흠뻑 젖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백로 무렵이면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시작하고,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할 때까지 잠시 일손을 쉰다. 그래서 가족들과 아주 특별한 성묘를 갔다. 내 시조 묘다. 시조는 고려 때 사람 이임간인데, 이성계와 같이 쿠데타를 벌여 조선을 창업하는데 한몫을 했다. . 그의 증손자 종무가 일찍 아버지와 함께 왜구를 소탕하는 일에 소질이 있어 관운이 트이더니 대마도까지 정벌해 후세에 많이 알려졌다. 우리 집안 중시조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명장인지는 나로서도 의문이 있긴 하다. 정말 희한하게도 10여 년 전 내가 이곳 용인의 고기리로 이사를 온 후 알게 된 것이, 이종무 묘가 집에서 걸어서도 갈 지척에 있었다는 것. “우리가 시묘살이하러 왔구먼.” 

 
추분 秋分 9월 22일
전남 여수 앞바다 풍경이다. 백로가 지나면 추분이 온다. 낮과 밤이 절반인 추분은 황도와 적도의 중간 점을 가로지르는 날이라 늘 변화 없이 9월 23일 경이다. 하지만 추분의 기후는 10월 초로 늦춰졌다. 기후변화 탓이다. 추분과 춘분은 모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지만 추분의 기온이 약 10도 정도 높다. 여름의 끝자락이 남긴 예열 때문이다. 이때는 우리 최대의 명절인 추석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만물을 거두는 시기다. 특히 제철 수산물로 서해안이 으뜸인데, 전어가 주인공이다. 서해안의 수온이 꾸준히 올라가면서 따듯한 바다를 좋아하는 전어는 남해안에서 서해안 동해안 등지로 북상하고 있다. 전어가 많이 잡히는 여수에서 ‘전어 축제’도 열리지만 9월에는 충남 서천까지 전어 잡이가 올라간다. 여름 전어가 등장해 가을까지 내내 잡히는 것이다. 전어가 사라지고, 여수를 찾는 여름 철새 왜가리는 이제 찬 바람이 불면 북으로 날아갈 생각을 한다.

 
한로 寒露 10월 8일
인천 북성포구로 물이 들어온다. 강화 연안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들어온다. 한로인 10월에는 틀림없이 추젓용 새우가 가득 들었을 것이다. 새우를 가득 담은 어선이 늘어서면 파시가 열린다. 선주와 선원의 가족이 직접 나서 잡아온 어패류들을 분류하고 담고 판다. 정신없이 바쁘다. 그 속에서 강렬한 삶의 의지를 발견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절기도 바뀌다 보니 여름이 팽창해 가을을 밀어내고 있다. 가을 기후가 지속하는 시기는 큰 변화가 없지만 대체로 초겨울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10월은 한로가 한 달 내내 차지한다. 한로는 24절기 가운데 17번째 절기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이 찬 이슬이 서리가 되면 다음 절기 상강이 된다. 이때쯤이면 하늘에서 기러기가 나는 광경을 보고, 길가에서 들국화가 피는 것을 본다. 

 
상강 霜降 10월 13일
경기도 양주시 기산저수지에 이슬이 내리고 수면에 찬 공기가 머물 때 월척을 기대하는 낚시꾼들이 몰려든다. 양주시의 숲에는 유난히 인공으로 조림한 잣나무가 많다. 국내 유통량의 절반 가까이 생산된다고 한다. 슬슬 청설모도 겨울 식량을 준비할 때다. 상강은 서리가 내리는 절기로 초반 무서리가 내리다가 막판에는 된서리가 내린다. 된서리 맞기 전에 재배하는 식물 중 서리태(콩)를 빼고는 모두 거둬들인다. 우리나라 절기가 지난 30년 전보다 많이 달라졌다. 겨울은 두 절기가 줄었고 여름은 두 절기가 늘었다. 24절기 중 춘분, 추분, 하지, 동지처럼 지구의 공전으로 발생하는 고정된 현상 외에 온도, 강우, 서리 등 생물의 생장에 미치는 절기의 화는 큰 폭으로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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