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의 내외부 전경

Before It Melts
아이스크림도, 인생도 녹기 전에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 녹기 전에. 이곳에 들어서면 오락실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인절미와 귀리의 앞 글자를 딴 ‘인귀만점’, 아로니아(와 블루베리), 파인애플, 민트가 들어간 ‘아파트’, 칡으로 만든 ‘칡가이’ 등 매일 바뀌는 메뉴에 붙여진 이름은 센스 넘치고 유쾌하다. 웃음이 절로 나는 작명에 더해 매일의 소소한 즐거움도 놓치지 않는다. 주변 학교의 개교기념일엔 학생을 위한 특별 이벤트를 열고, 따릉이를 타고 오는 손님에게는 주행 거리만큼의 금액을 할인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오늘도 녹기 전에에선 어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까?

녹기 전에를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매일 메뉴가 바뀌는 수제 아이스크림 전문점이에요. 아이스크림 개발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에 관한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어요. 가끔 그림책 출판사, 중고거래 앱, 엑셀러레이터 등의 다양한 기업과 여러 형태로 협업을 진행하기도 해요.

2017년 익선동에 매장을 연 후, 염리동으로 매장을 이전했어요. 최근 2호점인 낱점을 오픈했고요. 아이스크림 가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5년에 한 번씩 직업에 변화를 주기로 결심했어요. 전기∙전자 분야에 종사하다 다음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아이스크림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일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즐겁더라고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하게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아이스크림 가게는 카페나 음식점과 달리 제품을 미리 만들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운영하거든요. 어떤 식자재로도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한 것을 다양하게 표현하기에도 좋은 수단이고요.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직접 쓴 책 * <좋은 기분> 앞머리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보다 감상하는 게 좋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오랫동안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나 봐요.
정말 좋아해요. 한 사물을 다양한 각도로 보려 하고 반드시 한 가지 용도로만 존재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어차피 모든 사물이 물질 덩어리이니까요. 특히 아이스크림은 상당히 특이한 물체예요. 스푼을 쥐었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냉기,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리는 물성. 평소에 접하는 사물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죠.
* 일과 삶의 기본인 ‘좋은 기분’에 대한 책으로, 함께 일할 동료를 찾는다며 100장 이상의 ‘접객 가이드’로 올라온 채용공고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며 단행본으로 제작됐다. 2024년 출간.
상호명 ‘녹기 전에’는 어떤 의미로 지었나요?
아이스크림이 시계처럼 시간을 알려주는 존재더라고요. 보고 있으면 녹잖아요. 매장 외관에 간판 대신 시계를 걸어둔 것을 보셨나요? 예전부터 저에게 시간은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시간이 지나면 죽고 사물도 외관이 변하게 마련이죠. 이 세상 모든 게 유한해요. 5년에 한 번 직업을 바꾸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다양한 기억을 갖는다면 적어도 죽기 직전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저는 시간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아이스크림(인생)이 녹기 전에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를 담았어요.

아이스크림 이외에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평소 저글링하는 걸 좋아해요. 중력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안 그래도 오늘 아침 중이염에 걸렸는데, 전정기관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확인차 저글링하다 왔어요. (웃음)

신기하게도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 공학도가 많은 것 같아요.*
일리 있어요. 아이스크림은 식품 공학으로 분류되거든요. 단순히 얼린 음식이 아니라, 물 분자 구조와 다른 성분 간의 상호작용을 세심하게 설계한 공학의 산물이죠. 공학의 정교한 계산으로 아이스크림의 맛과 질감, 색이 결정돼요.
* 피치바이피치가 인터뷰한 연남동 젤라토 가게 피에트라 운영자는 건축을 전공했고, 필동 식물성 아이스크림 브랜드 코코너즘 운영자는 자동차 회사를 다니다 가게를 오픈했다.

녹기 전에의 아이스크림은 젤라토와 어떻게 다른가요?
최근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이스크림이냐, 젤라토냐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와 나눴어요. 가끔 손님이 젤라토냐고 물어볼 때가 있거든요. 그럼 저는 ‘그 차이가 무엇이냐’고 오히려 반문하곤 해요. 사실 아이스크림과 젤라토는 만드는 방식도, 기계도 같거든요. 대부분의 손님이 젤라토가 더욱 쫀득하다고 대답하곤 하는데, 그것도 좀 애매해요. 쫀득함의 정도는 유지방 함유량에 따라 결정되거든요. 그걸 구분하는 게 모호한 것 같아 저희는 그냥 아이스크림이라고 불러요.
원래 브랜딩에도 관심이 많았나요?
사실 저는 녹기 전에를 브랜드라기보다 가게로 소개하는 편이에요. 브랜드라는 단어 사용을 지양하려고 하죠. 녹기 전에를 오픈하고 나서 저 역시 브랜딩, 마케팅, 기획, 디자인에 심취해 있던 때가 있었어요. 관련 도서를 거의 다 정독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브랜드라는 건 소비자가 아닌 창작자의 언어처럼 느껴진다는 게 제 결론이에요. 동시에 다른 이의 성공 전략이 이미 지나간 영광을 붙잡는 것 같달까요. 가게 혹은 브랜드는 언제나 소비자 옆에 살아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성공한 브랜드가 갖고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브랜드를 만든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 맞게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더라고요. 그걸 깨닫고 나니 더 이상 브랜딩 공부는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잘 되봤자 구멍가게라면,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죠. 그저 묵묵히 일할 뿐이에요.

녹기 전에 SNS 게시물 속 겸연쩍은 듯한 말투도 의도한 브랜딩의 일환이라고 생각했거든요.
SNS을 통해 무언가를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이 영 어색하더라고요. ‘아이스크림 맛있어요.’ ‘먹어보세요.’ 아무리 온라인상이라 해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멋쩍었죠. 지금도 그래요. (웃음)

2017년부터 만든 아이스크림 종류가 400여 가지에 이른다고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레시피가 있다면요?
메뉴가 매일 바뀌니까 지금까지 500개 이상은 만들었을 거예요. 2021년 즈음, 녹기 전에를 좋아하는 손님들이 모여 만든 SNS 오픈 채팅방에서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공유해주곤 했어요. 당근, 고수, 깻잎, 통조림 참치 등 도전적인 재료를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죠. 그때는 정체를 모르는 손님이 보내주신 식자재로 아이스크림 만들기에 빠져 살았어요.
 
왜 메뉴가 매일 바뀌나요?
의도한 마케팅 전략은 아니에요. 직장인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매일 같은 일을 하잖아요. 행복은 일상의 작은 변주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은 매일 메뉴를 바꾸는 거예요. 한마디로 일하는 사람을 위한 운영 방식인 거죠.

그날의 메뉴는 어떻게 결정하나요?
사전에 미리 다 만들어 놓고  그중 다음 날 판매할 메뉴는 전날 오후 9시에 정해요. 요즘 저는 10시간 내내 아이스크림을 제조하며 살고 있어요.

최근 2호점인 낱점을 오픈했어요. 가오픈 기간이었던 한 달 동안 일부러 SNS에 오픈 소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오픈했다고 여기저기 알리는 게 이 동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우선 이곳에 터를 두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임대료는 얼마나 상승할지 등 미리 고려해야 하는 것이 많아요. 그중 하나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며 가게를 유지할 것이냐인데 저에게는 그게 동네의 주민인 거죠.
 
이 자리는 어떻게 발견하게 됐나요?
2호점을 내고 싶어서 공간을 찾고 있었어요. 여기는 원래 낱이라는 홍차 가게였는데, 사장님이 제게 먼저 연락을 해왔어요. 처음 보자마자 인테리어부터 분위기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더라고요. 오래된 동네 특유의 푸근한 정서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건물 높이가 2미터 정도로 낮은 것도요. 녹기 전에에 들를 때 만큼은 손님들이 스스로를 치장하지 않고 ‘낮은 상태’로 오길 바라는 마음을 알아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가장 중요한 건 저를 포함한 동료들이 기거하기에 편하고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이에요.

일하다는 말 대신 기거하다는 표현을 쓰시네요.
어쩌면 직장은 집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잖아요.

공간을 꾸밀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원래 있던 것을 남기려고 했어요. 돌과 시멘트로 된 바닥, 테이블, 조명, 액자 등등 낱 사장님이 꾸며 놓은 일부를 이어가고 싶었거든요. 매장 이름을 ‘낱점’이라고 지은 것도 같은 이유죠. 자세히 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재미난 텍스트와 작은 소품으로 저희의 정체성도 녹였고요.

손님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나무 심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한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요즘은 자주 하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에요. (웃음) 아주 옛날엔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만 도파민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큰 즐거움을 얻기 위해선 그만큼 어마어마한 자극이 필요했단 의미겠죠. 요즘엔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보니,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만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옳은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멀리 보고 길게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그게 무엇일까 고민하다 나무 심는 일을 떠오르게 됐고요. 지금 심는 나무로 당장 어떤 결과를 만들 순 없지만 10년 후엔 그 나무가 우리 키보다 더 크게 자라있을 테니까요.
 
여행하는 건 좋아하나요?
저는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요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예요. 히키코모리 같고 대화가 안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웃음) 제가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시작한 첫 해에 지구 크기가 궁금해 한 바퀴를 돈 적이 있거든요. 그 경험을 통해 저는 일상에서 받는 자극이 더 크다는 걸 깨달았어요.

직접 돌아보니 지구 크기가 느껴지던가요?
캐나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러시아를 거쳐갔어요. 매일 비행기나 열차를 탔는데, 한 3주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물론 중간에 쉬기도 했고요.

협업 러브콜도 많은데, 녹기 전에가 가진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가게를 운영하는 건 A부터 Z까지 모두 갖추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브랜드마다 원하는 요소가 다 다르잖아요. 녹기 전에는 다양한 캐릭터를 가졌으니 그 어떤 브랜드와 협업해도 잘 어울리는 거죠. 제가 아이스크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동과 재미, 아이디어를 각자의 방식으로 활용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곳을 찾는 손님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