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에서 운전을 하면 고성을 주유소만큼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얘기를 어느 정도는 신뢰해도 좋다. 문화유산 리스트에 등재된 고성의 수가 2,000개가 넘으니 말이다. 그중 애버딘 북쪽에 있는 슬레인스성은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해상 절벽 끝에 자리한다. 다만 슬레인스성은 콜리스턴(Collieston)에 있는 올드 슬레인스성과 좀 더 북쪽의 크루든 베이(Cruden Bay)에 외떨어져 있는 뉴 슬레인스성, 두 곳이 있으니 헷갈리지 않도록 유의하자. 올드 슬레인스성은 사실상 성의 원형을 짐작하기 힘들 만큼 폐허로 남아 있다.
‘뉴’ 성이라 해도 그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400년을 더 거슬러 오른다. 지역 영주 클랜 헤이(Clan Hay) 가문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1597년 중세풍의 스코틀랜드 바로니얼 양식으로 이 성을 다시 지었다. 뉴 슬레인스성은 1925년 존 엘러먼 경(Sir John Ellerman)에 의해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데, 새 주인이 된 그가 세금을 면하기 위해 성의 지붕 전부를 헐어버린 것. 외벽과 내부 골조만 남아 형체를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슬레인스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그 기묘한 형상으로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성 입구에선 드라큘라 공연에 관한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는 19세기 성주의 초청을 받아 이 성을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다. 당시 깊은 영감을 얻어 집필한 작품이 바로 〈드라큘라〉다. 성 한복판의 기하학적인 팔각 중정은 드라큘라의 성을 묘사할 때 고스란히 차용되기도 했다. 브램 스토커에게 영감을 준 슬레인스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연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오늘날 이곳을 찾은 이들은 여전히 쇠락한 성의 잔해가 남긴 서사를 끄집어낸다.
슬레인스성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펼친 뒤엔 맥주로 목을 축이자. 스코틀랜드 최고의 크래프트 브루어리가 차로 불과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 브루독은 2007년 설립한 비교적 젊은 브루어리로, 대범한 마케팅과 함께 빠른 속도로 스코틀랜드 각지의 펍을 평정했다. 다소 지루한 정통 맥주 문화를 고수하던 스코틀랜드에서 과감하게 아로마를 첨가한 브루독의 크래프트 맥주가 반향을 일으킨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완고하지만 때로 과감할 것. 어쩌면 그게 스코틀랜드인의 기질일 수도 있으니.